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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기 Sep 22. 2020

기묘한 조합, 더 기묘한 여행

후쿠오카(2020)

꿈을 꾸고 나면 잔상이 심하게 남는다. 꿈속에서 죽을 것 같이 달려들던 모든 것들이 막상 눈을 뜨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채로 허무하게 사라지기도 한다.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처럼 살아가면서 목숨을 걸고 덤벼드는 모든 일들이 한낱 잔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 그토록 바라던 갈망에 대한 무게는 고스란히 덜어진다. 진가상, 고림표 두 감독이 연출한 영화 <화벽>(2011)은 인간들이 꿈꾸는 선계, 즉 선녀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갈망을 그려냈다. 영화는 사랑을 주제로 그 무게와 책임이 어떤 것인지를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아름답게 이해될 수 있도록 묘사했지만, 이를 달리 해석하면 사랑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욕망, 그 자체에 대한 얘기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선녀를 향한 인간의 마음도 어찌 보면 사랑이 덧씌워진 욕망이지만, 그 욕망조차 껍질을 벗겨내고 나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인격과 책임이 어떤 것인지, 가장 기본적인 욕망인 사랑에 엄청난 무게가 존재하고 있음을 마치 돌려 얘기하는 듯하다.


장률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어려웠다. 특히 <경주>(2013)가 내게는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이야기는 잔잔하게 밀려들지만 그 색깔을 찾기가 힘들어 보는 내내 백지를 쳐다보는 기분이었다. 어지간해서 영화를 볼 때 조는 경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름 밀려오는 졸음을 쫓느라 손짓발짓 다 섞었던 기억이다. 그래서 이 영화도 두려운 마음을 한껏 머금고 달려들었다. 오히려 시작부터 생각할 거리를 여기저기 마구 흩뿌려놓아 걱정했던 것만큼 졸음을 쫓을 필요는 없었지만 말이다. 다만, 문제의 보기를 내놓고 마지막까지 답을 알려주지 않는 느낌. 그것 때문에 찝찝한 마음을 감추기가 어려웠다. 영화 <후쿠오카>(2020)는 딱 그런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이들이 이 방향 저 방향으로 정답 맞추기에 정신없지만 결국에는 그 정답을 듣지도 못한 채 시험이 마무리되는 그런 느낌. 이 느낌에 적응되고 있다면 아마도 장률 감독의 스타일에 딱 알맞은 관객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보이는 색감 그대로 깔끔하고 간결하다. 대학 선후배 사이인 해효(권해효 분)와 제문(윤제문 분)은 28년 전 대학에서 만난 순이를 두고 사랑 다툼을 벌였다. 묘령의 여인 순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어떤 선택도 하지 못한 채 학교를 자퇴하고 그들을 떠나 버렸다. 그렇게 남은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원망을 삭이지 못한 채, 해효는 순이의 고향인 일본 후쿠오카에서 술집을 운영하고, 제문은 순이가 자주 들렀던 서점을 운영하며 오랜 시간 정신적 방황에 빠져 살고 있다. 영화는 어느 날 스무살 안팎의 소담(박소담 분)이 제문 앞에 나타나 후쿠오카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하게 되면서 그 여정을 시작한다. 이야기를 살펴보면 알겠지만 영화는 처음부터 물음표를 가득 안은 채 시작된다. 스무 살을 갓 넘긴 소담이 교복을 입고 있는 모습에서부터 갑자기 등장한 소담의 제의를 제문이 어떻게 선뜻 수락하고 함께 후쿠오카로 건너가게 되었는지 등 말이다.


언뜻 보면 말은 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기본적인 상식선을 벗어난 이야기 흐름은 관객들에게 계속해서 숙제를 던진다. 이야기를 해석하려면 이 모호한 구조부터 풀이하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를 접해왔던 관객이라면 누구나 해효와 제문과의 관계를 이어주는 소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것 같다. 일본어와 중국어를 하지 못하는 소담이 현지인들과 너무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모습에서,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나는 등 신출귀몰한 그녀의 모습에서, 어쩌면 그녀가 귀신이라도 되는 걸까 하고 해답을 던져보는 거다. 하지만 장률 감독은 자신이 제시한 이런 기제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영화에서 답습해왔던 방식 그대로 따라오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영화를 계속 읽다 보면 영화 <후쿠오카> 속 모든 기제들은 영화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해석하고 답을 내려 하기 보다는 하나하나의 의문점조차 이야기 속에 담아내기를 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이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순이를 가운데 두고 이어지는 해효와 제문 간의 연결고리 상에 소담이 위치할 자리는 없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단순히 큰 그림만 바라봐도 소담의 역할은 두 사람 사이에서 마치 순이의 존재와 같이 둘을 이어주고 두 사람이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왔던 응어리들을 해소시켜 줄 역할을 맡고 있다는 거다. 이러한 이해 속에서 그녀의 정체가 과연 무엇인지 이걸 파고들기에는 영화가 펼쳐놓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깔끔하고 담백하다. 결국 이 영화는 해효와 제문 두 사람이 만들고 두 사람이 풀어낼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들의 마음을 이어가고자 카메라는 빠르게 서울의 정은서점에서부터 후쿠오카의 술집으로 동선을 서둘러 움직인다. 여기에 두 사람이 들르는 커피점, 이리에 서점, 우동집 등 모든 곳곳의 후쿠오카의 배경들이 제각각의 색깔을 가지고 있음은, 그들의 오래된 마음이 대화를 통해 해소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언제나 그렇듯 소담은 둘을 이어주고 대화를 이어가게 만드는 역할을 자처한다. 그 속에서 그녀를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어색하지만 한편으로는 꽤 자연스럽기도 하다.


이 영화는 추억을 끄집어내는 색감이 짙다.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가 가짜인건지, 즉 누가 귀신이고 누가 현실 속 실제인물인지를 찾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순이라는 인물을 가슴 속에 품고 28년 간 각자의 인생을 살아온 두 사람이 만나 어떻게 응어리를 풀어낼지를 제3의 시각에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리에 서점에서 만난 작은 인형은 28년 전 순이에게 두고 온 두 사람의 미련이자 그리움이다. 계속해서 끄집어내려 했지만 손에 닿을 듯 닿지 않는 인형의 자리는 술집과 우동집, 후쿠오카 거리와 철탑 등으로 자리를 하나씩 옮겨가며 두 사람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어느 시점에서 자연스럽게 비워지게 된다. 여기에 소담과 이리에 서점주인(야마모토 유키 분) 간의 키스는 두 사람이 과거의 순이에게 보내는 마지막 작별인사다. 결국 그들도 계속해서 그들을 따라다니던 철탑의 흔적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던 거다. 그렇게 지워버린 흔적은 철탑 꼭대기에 올라 해효의 술집이 까마득히 멀게 그리고 작게 보이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미련을 놓아버리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많은 숙제를 떠안고 가는 것 같아 마음이 꽤 무거웠다. 그들은 왜 갑자기 후쿠오카를 방문했으며, 농아아저씨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제문이 늘 찾아본다는 야동이야기는 왜 계속해서 자리를 꿋꿋이 지키고 있는 건지, 갑자기 나타난 중국여인과 카페 배경의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그레타 거윅 감독의 <프란시스 하>(2012) 포스터, 그리고 소담의 정체까지 함께 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이런 요소들을 하나하나 해석하려는 건 이 영화가 요구하는 방향이 아님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다. 결국 그들이 가진 순이에 대한 사랑, 그 사랑에 대한 흔적이 그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풀어내어 다시금 그들의 삶을 일으켜 세워야 하는지, 장률 감독의 이야기는 과거보다 이제 막 시작될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그림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소담이 미련처럼 남아있던 인형을 맡기고, 독약 통에서 꺼낸 사탕을 입에 넣었을 때 인형이 움직이는 모습에서부터, 그들의 꿈은 비로소 깨어나게 된다. 그 결정은 멀리 돌아온 것처럼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기에, 그들의 표정에서 다시 한 번 희망을 보여줄 수 있다면 영화는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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