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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시모프 Oct 23. 2023

<화란> 어둠이 어둠을 건져 올릴 때

내 중학교 시절은 피 튀기는 학원폭력이 난무하는 곳이었다. 그때, 서울에서 전학 온 친구가 있었다. 그 아이는 강백호처럼 선천적으로 붉은 머리를 가진, 반에서 꼴찌인 아이였다. 어느 날 내가 반 친구들에게 폭행을 당하려 하자 그 아이가 나타났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그놈들을 비웃더니 마치 만화처럼 발차기만으로 제압해 나를 구해줬다. 당시 그 아이는 나와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난 심각한 가정불화와 날이 서있는 학원폭력 가득한 정글 같은 학교생활에 지쳐 '삐뚤어질까'라고 그 아이에게 가볍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가볍게 한 이야기에 '절대 그러지 말라'라고 진지하게 혼내듯이 다그쳤다. 내가 그런 안 좋은 환경에서도 나쁜 길로 가지 않았던 건, 그 친구의 한마디 덕분이었다.


그런 종류의 아이가 있다. 생각보다는 말이 앞서고,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아이. 영화 <화란>의 김연규(홍사빈)는 말로 자신을 변호하기보다, 행동으로 변호하려 한다. 그런 아이들은 오해도 쉽게 받고,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처지를 더 안 좋은 구렁텅이로 몰아가기 쉽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말보다 폭력이 앞서던 환경의 영향이 크다. 연규에겐 내 친구처럼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어른, 혹은 어른스러운 친구가 없었으니까.


그의 주변 어른들은 하나같이 어른스럽지 못하다. 그는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네덜란드의 옛 이름인 홀란드를 한자로 음차 한 화란. 연규는 화란에 가면, 모두가 비슷비슷하게 산다는 것을 듣고 그곳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곳 역시 사람 사는 곳이다. 그곳에서 몇 개월 일해본 나도 그런 동경을 한때 가졌지만, 한낮 길거리에서 킬러가 표적을 죽이는 걸 겪고서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비현실적인 화란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사는 연규에게도 의지할 어른이 생긴다. 치건(송중기)은 자신의 상황과 빗대어서 연규를 도와주려고 한다. 그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 자신이 받지 못했던 '의지가 되는 어른의 부재'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에게도 그때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하고 말이다.


<화란>은 여러 가지가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폭력적인 환경, 피가 섞이지 않은 남매, 네덜란드에 대한 막연한 동경, 친근하게 다가오는 전혀 다른 환경의 어른,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하지만 점점 수렁으로 빠지는 선택. 어둠은 어둠을 불러들인다. 연규에게 필요한 돈을 전해주고 '찾아오지 마라'라고 한 치건의 말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조금은 둔탁해 보이고 세련되지 못한 이야기 속에서도, 직접 비슷한 일들을 겪은 내가 볼 때 정말 현실적으로 그려진 상황과 인물들의 감정들은 너무나 아프게 다가왔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화란>이 다른 누아르 범죄물, 폭력조직물과 조금 다른 점은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들이 전혀 멋있게 그려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직에 들어간 연규는 직속 선배인 승무(정재광)와 같이 밤중에 오토바이를 훔치고 다닌다. 그리고 연규에게 묻는다. "우리가 지금 뭐 하는 거 같노?" 작업이라고 말하는 연규에게 그는 단호한 눈으로 이야기한다. "도둑질." 지금 하는 일을 포장할 생각도 없고, 어떤 나쁜 짓을 하는지 충분히 알고 있으라는 이야기다. 이들은 하나같이 지저분하고 죽어있는 눈빛을 하고 있다. 다들 어딘가에서 이미 죽었던 목숨이다. 그러기에 미련 없이 그런 짓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본인들이 오토바이를 훔쳐서 도둑맞은 상인들에게 되파는 짓을 반복하고 있다. 오토바이들은 페인트만 새로 칠해질 뿐, 계속해서 이곳을 맴돈다. 마치 그 동네에 평생 태어나 사는 연규와 치건처럼.


어둠으로 갔어도 뭔가 잘 풀릴 수 있었던 연규의 상황에 금이 가게 한 것은 오히려 그가 가지고 있던 어설픈 착한 마음이었다. 배달부 완구(홍서백)에게서 훔친 오토바이를 몰래 되돌려줬다가 다시 훔쳐야만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것이 완구의 마음을 더 부서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완구의 마음에 간 균열은 연규의 오토바이에 금을 그었고, 그것은 연규와 치건의 사이에 금을 만들었다. 받아온 돈을 오토바이 사고로 다 잃어버린 상황, 치건이 오토바이를 망가트려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생각들은 연규의 치건의 대화를 막아버린다. 말을 못 하게 된 연규는 또다시 최악의 해결책을 최선이라 생각하게 된다.


영화 <그란 투리스모>에서도 나오는 말이지만, 어떤 사고가 났을 때 정말 안 좋은 것은 그 사고 자체가 아니라 그 사고로 인해 감정적 동요가 심해져 최악으로 대처하는 자세다. 지금까지 어떤 사고가 났을 때 그것을 해결하는 연규의 방식은, 그 사고를 최악이라 생각하고 더 일을 키워왔다. 정말 최악은 일이 터진 시점이 아니라, 그 일을 최악이라 여기고 모든 걸 포기하는 그 행동이 최악으로 만든다.



연규는 상황 파악을 하고 기다리는 치건에게, 대화하기를 거부하고 폭력적으로 해결책을 던져버린다. 일들은 그렇게 해결될 리가 만무하다.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지만 그것은 점점 스스로가 괴물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악의에 받쳐 스스로 손을 잘라서 해결하려는 연규와, 오해부터 풀려고 하는 치건. 결국 둘의 마음의 차이는 목숨을 건 싸움이 된다.


치건의 목을 송곳으로 찌르려는 찰나, 연규는 제정신으로 돌아와 행동을 멈춘다. 그러나 치건은 연규에게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송곳을 자신의 목에 겨눈다. 죽었던 목숨을 거둬준 조직에 대한 빚, 자신을 죽였던 세상에 대한 빚이 그런 어둠의 나선을 걷게 만들었지만 그들은 그렇게 누군가 자신들을 나선에서 벗어나게 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치건은 죽음으로 구원받았다. 그리고 연규 역시, 생각이나 말보다 어설픈 감정이 앞선 행동의 결말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았다.


낡은 양철상자에 들어있는 연규의 꿈. 화란에 대한 사진과 글, 돈이 들어있다. 연규의 상자는 그의 모든 희망이기도 하지만 닿을 수 없는 꿈이다.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상자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보고 치건은 깨끗한 새 나무로 상자를 만들었었다. 치건이 죽고 나서 그 상자 안에는 그를 어린 시절 죽음에서 건져 올린 낚싯바늘 하나만 들어있음이 보인다. 멋진 새 상자를 만들었지만 치건은 그곳에 넣을 산 사람으로서의 꿈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다른이에게 낚싯바늘로 건져 올려진 순간 이미 그는 죽었기 때문이다. 상자가 꿈이라면, 치건은 누군가를 건져낼 수 있는 낚시 바늘이 되고 싶었던 듯하다. 비록 낡고 녹이 슬어 쓸모없어진 바늘이지만, 누군가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존재. 하지만 어둠이 어둠을 건져올린들, 그것이 빛이 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자신이 죽음으로써, 스스로 구원을 받으면서, 그는 연규를 건져 올렸다.


집으로 돌아온 연규는 엄마가 양아버지에게 맞아 죽어있는 것을 본다. 연규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양아버지를 그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야구방망이로 내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치건의 죽음이 가르쳐 준 것이 그것이었다. 당장의 감정해소보다, 자신의 앞날을 위해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사람은 자신이 묶은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다. 내가 정한 나의 한계를 넘지 못한다. 마지막 오토바이를 동생과 타고 달려가는 모습은 자신이 묶은 굴레를 드디어 벗어나는 모습이다. 장물이 되어 돌고 도는 오토바이도, 폭력의 굴레에 갇힌 연규도, 가정과 학폭의 굴레에 갇혀있던 동생도, 모두가 벗어나 달린다. "더럽지? 하지만 해야돼, 이거."를 읊조리던 치건의 말이 들리는 듯 하다. 이젠 하지 않아도 된다.


굴레를 벗어나서 달리는 그 길, 그곳이 화란이 아니고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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