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오트리 Aug 14. 2024

느림의 자유



캘리포니아 계절에 대한 내 첫 느낌은 "느리게 변한다"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느리게 변한다기보다 변화의 폭 자체가 크지 않다.

너무나도 뚜렷한 한국의 사계절에 25년이나 익숙해 있던 나에게, 처음 두어 해 동안의 캘리포니아 계절은 변화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마치 봄/여름/여름/가을의 사계절이 1년 단위로 반복되는 느낌이었다. 재미 삼아 밥으로 비유해 보자면 식은 밥 /뜨거운 밥 /뜨거운 밥 /찬 밥 같은 배열이랄까.


계절만 느린 것은 아니다.

관공소를 가도, 상점에 가도, 병원에 가도, 대체로 일이 느리게 돌아갔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우체국에 소포를 부치러 간 상황. 우선 줄을 서서 대기한다. 순번이 오면 데스크로 걸어가서 먼저 우체국 직원과 “hi”, “hello”등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것은 기본, 오늘 날씨가 어떻다, 네가 입은 옷이 뷰티풀, 직원과 손님이 안면이 있는 사이라면 "요즘 일 잘 되어가?", "가족들은 잘 지내지?" 등의 안부가 이어진다.

둘만 있는 듯 세월아 네월아 대화가 계속되는데, 지금 같으면 핸드폰이라도 켜서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때우겠지만 멀뚱멀뚱 서서 양손에 우편물이나 소포를 들고 그런 광경을 참으며 몇 번이고 내 차례를 기다리려면 속이 터진다. 그 뒤로 볼 일이 연달아 있거나 약속이나 예약 잡힌 거라도 있으면 그야말로 답답해 죽는다.

더 황당한 것은 이렇게 느려서 어떻게 살겠나 하고 주변을 둘러보면 누구도 문제 삼지 않고 유유히 기다린다는 것이다. 나만 혼자 들들 볶고 있다.



애니메이션 영화 <주토피아>에서  주인공 경찰 주디(토끼)가 차량조회를 하러 차량국(DMV)에 갔을 때 데스크에서 일 처리를 맡은 공무원 플래시(나무늘보)가 느려도 너무 느려서 안달 나 펄쩍 뛰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그런 느낌이다.  



처음에는 느린 속도에 적응하는 것이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차차 익숙해지며 깨달은 것은 빠르나 느리나 결과적으로 봤을 때 그다지 삶에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참 더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내가 예전에 분주함으로 달달거렸던 시간들은 대체로 그럴만한 별 이유 없이 쫓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았다.

느림 속에서 오히려 얻은 것이 있다면 속도가 빠를 때 휙휙 지나치던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게 되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코끼리 공장의 해피엔드>에서 미국의 추리소설 작가, 로스 맥도널드의 글을 인용하여 이렇게 썼다. “캘리포니아에는 사계절의 변화가 없다고들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다. 주의력이 부족한 인간이 그 변화를 느끼지 못할 뿐”이라고.



주의력.

지금 시대에 너무나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내 앞에 사람을 앉혀두고도 손 안의 화면에 주의를 빼앗기고 그 화면 안에서 조차 한 가지에 몰두하지 못하고 손가락 몇 번의 까딱임으로 날다람쥐처럼 이 앱에서 저 앱으로 마구 분주히 날아다니니 말이다. 인간의 몸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몇 배속의 일들을 손 안의 기계로 해내고 있으니 홀릴 만도 하다. 그러나 솔직히 내가 방금 전까지 뭘 보았는지 핸드폰을 덮고 몸을 고쳐 앉는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는 경험을 우리 모두 하고 있지 않은가.



느림은 더 빠른 박자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느림은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고 시간에 쫓겨 허둥대지 않겠다는 의지, 결국 세상을 받아들이고 삶의 길에서 우리 자신을 잊지 않는 능력을 키워가겠다는 의지의 확인일뿐이다.
 _ 피에르 쌍소



결국 느림은 선택의 문제.

비교적 빠른 사회에 속하건 느린 사회에 속하건 그 사회의 속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선택할 삶의 태도이자 개인의 자유이다.



작가의 이전글 합법적 이방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