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은 초여름처럼 기온이 높아지더니 아니나 다를까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비가 내린다.
비가 오면 몸도 마음도 바닥에 처 박히는 건 누구나 비슷하겠지.
내일은 3월 중순임에도 영하 3~4도까지 내려간단다.
게다가 강원지역은 대설주의보까지 내려져 있고.
이번 말고도 꽃샘추위가 한두 번은 더 남아 있겠지.
아무리 그래봐야 이미 꽃망울이 터져버린 산수유나 매화꽃이 다시 가지 속으로 숨어버릴 리 없으니 이미 와버린 봄은 그러거나 말거나 여름을 향해 기온을 높여 갈 테다.
지구의 종말이 온다느니, 휴거가 일어난다느니 하며 세상이 끝날 것처럼 법석을 떨며 맞이 한 21세기가 벌써 스물 하고도 세 해 째 접어들었다.
매년 초면 반복하는 to-do list는 부끄러움을 모른 채 올해도 써 붙인 지 벌써 세 달째다.
요 며칠 동안 잠자리에 들며 '석가모니의 가르침'이라는 게시물을 유튜브에서 들었다.
양압기와 우울증 약은 1년이 넘어서인지 지겹기도 하고 그다지 효과가 없는 듯한 데다가 대체 이 화학물질이 내 위장을 얼마나 약하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랬을 거란 짐작에 화도 난다.
취침 명상이나 음악을 찾아 듣지만 취향에 맞는 게 아니다 보니 매번 1~2분 정도 듣다가 끄느라 실낱같은 그나마의 졸음끼도 날려버린다.
어쨌든 우연히 만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듣다 보니 내가 사는 지금의 방식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방식?
거실 벽에 스스로를 깨우칠만한, 압박할만한 경구를 써서 붙여 놓았다.
그건 매주 일요일에 다른 명언으로 교체해서 붙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침마다 하겠다며 국민체조 순서도를 붙여 놓았다.
다시 그 옆에 daily to-do list 점검표를 붙여서 매일매일 이행 여부를 표시하고, 바로 위에 따로 붙여 놓은 년간 점검표에는 한 달의 이행 결과를 적어 둔다.
사위가 옮긴 새 직장이 우리 집에서 가깝기에 큰 아이 내외가 와있는데도 그대로 붙여놓을 만큼 뻔뻔하다.
사위 눈엔 분명 무당집처럼 보였을게다.
나는 마치 이단 종교의 숭배자로 보였을 테고.
침대에서 눈 뜨면 10여 분 소요되는 아침 명상부터 한다.
거실에 나와서는 벽에 붙여놓은 국민체조 순서도를 보며 체조를 한다.(지금은 안 봐도 몸이 알아서 다음 순서를 이어가지만)
올해 목표 중 첫 번째에 놓인 목표를 매일 15번씩 쓰는 게 daily to-do list의 첫 번째다.
그래서 새해 첫 날부터 매일 쓰고 있다.
하루의 일상은 또 어떠할까.
대충 하거나 거를 때도 있지만 대체로 이러하다.
위의 루틴을 다 마치고(때론 순서가 바뀌기도 한다) 3km 떨어진 전철역에 집사람과 큰 아이를, 작은 아이는 3km 더 가서 학교 가는 셔틀버스 정류장에 내려주고 집으로 온다.
여유가 되면 아침 식사를 차려 먹고(내가 또 먹는 거에 진심인지라 생선 또는 고기를 굽기도 하고 가끔은 간편식으로 부타동을 만들어 먹기도 한다. 물론 나 혼자), 샤워하기 전 따뜻한 물이 나오기 전 버려지는 찬 물이 아까워 강아지 배변판을 씻는다.
양압기 호스와 물통을 수돗물로 씻어 널어놓고 샤워를 한 다음 와이셔츠를 다려 입고 고객을 만나러 차를 몰고 나간다.(레이싱하듯 했던 운전이 이젠 여간 피곤한 게 아니다)
하루에 세 고객은 만나야 한다는 to-do list의 목표를 채우고 오후 늦게 사무실에 들러 팀원들과 수다 떨고, 업무 정리하고 작은 아이 끝날 시간이 맞으면 데리러 가거나 만나서 차에 태우고 집에 돌아온다.
귀가해서는 한 달에 두 권은 읽어야 하는 책을 꺼내 읽어야 하고, 블로그에 한 줄이라도 끄적거려야 하고, 그날 배운 업무 관련 교육을 블로그의 또 다른 카테고리에 정리해야 한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면 아내의 이불을 여며주며 굿나잇 뽀뽀를 하고 막내 아이 이불을 펼쳐 덮어준다.(이리 말하면 막내가 미취학 아동이라 생각되겠지만 대학 3학년이다. 그뿐이랴? 여전히 엄마 손을 잡고 잔다)
매번 습관적으로 채워두는 현관문 걸쇠가 오늘도 제대로 걸려 있는지 뻔한 확인을 하고, 내 확인이 확실한지 한 번 더 확인을 한다.
to-do list 점검표를 마저 기록하고 고양이 세수하기 전에 같은 이유로 강아지 배변판을 씻고, 널어놓은 양압기 호스와 물통을 채워 양압기에 장착하고 1년 넘게 먹어 온 정신과 약을 먹은 후, 양압기를 얼굴에 끼우고 침대에 오른다.
그 이후 진짜 잠이 들 때까지 서너 번은 화장실을 다녀온다. 한 번에 겨우 5ml 정도 되는 소변을 만들어 짜내느라 말이다.(당연히 양압기는 벗었다 썼다를 같은 횟수만큼 반복한다. 덕분에 쓰고 벗는 건 귀신이다)
겨울엔 이 업무(?)에 가습기(물통이 10리터나 되는 초대형)에 물을 채우고 가끔 물때 닦는 것이 추가된다.
이리 말하니 혼자 사는 듯 하지만, 위트 넘치는 귀엽고 착하디 착한 아내(내가 하는 일보다 열 배는 많은 일을 싫은 내색 하나 없이 해치우는, 그리고 이 브런치의 구독자 중 하나인)가 있고, S대에 들어간 공으로 평소 손 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막내딸(수석 입학에, 4년 장학생에, 또 다른 장학금과 과외 수입으로 나보다 실질적으로 더 많이 버는, 그래서 그러려니 하는)과 같이 산다.
거기에 올해 초부터 큰 딸과 사위도 함께 사느라 넓지 않은 주거공간이 제법 북적거린다. 좋다.
이 모든 게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고 뭔가 더 나아질 듯해서 선택한 루틴이니 힘들고 말고 할 것도 없다.
게다가 30여 년을 바삐 힘들게 살아온 아내도 있는데, 명퇴하고 나서야 겨우 몇 가지 하는 일이니 티 낼 일도 아니다.
너무 신경 쓸 일이 많아서 건망증이 심해진 거라고 주변에서 진단해주긴 하지만 이젠 그냥 습관처럼 된 거라 꼭 그렇진 않은 듯하다.
그리 지내고 있던 중...
얼마 전 태국의 사원으로 출가했던 영국인이 쓴 책을 읽으며 나도 출가하고 싶단 생각이 문득 들더라.
덧붙여 석가모니 유튜브를 며칠 듣다 보니 이젠 이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아직은 살아 있지만 언제 갈지 모르는데 내가 너무 욕심을 내고 있는 건 아닌가?
좀 더 여유 있게 살고자 매일매일을 아침부터 이 난리를 치며 버둥거리는데 이게 맞는 건가?(여유는커녕 반드시 일을 해야 하는 처지가 팩트다)
2년도 채 남지 않은 국민연금 수령까지만 잘 버티다가 그때가 되면 그것만으로 살아도 되지 않을까?
아냐, 원래 성실하지 못했던 놈이라 핑계 대는 거야.
루틴도 힘들고 목표도 자신 없던 차에 내려놓으라고 하니 이 얼마나 달콤한 말이야.
게다가 석가모니가 누구야, 4대 성인 중 하나잖아?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라 해서 해탈했다지 않아?
더구나 성공하는 비법이라는 걸 따라 하는 것보다 내려놓는 게 훨씬 쉬워 보이잖아?'
어느덧 둘도 없는 친구가 된 아내에게 갈등의 일단을 내비쳤다.
늘 그러하듯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란다.
집 팔아 대출 갚고 남은 돈으로 작은 집으로 이사 가면 되고 자기는 아직 정년이 6년이나 남았으니 아껴 쓰면 살 수 있다고 사람 좋은 표정으로 대답한다.
식상한 대답에 심드렁해졌다.
그래서인지, 아님 그러지 못할 사람이라는 거 알아서인지 이어서 말해준다.
국민연금 받을 때까지는 열심히 일하라고...
그냥 그리 됐다.
갈등이라고 할 것도 없다.
변변한 노후 대책도 준비 못한 처지에 내려놓을 만한 건 또 뭐가 있단 말인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머리와 몸이 야속하던 차에 유명인이 귓가에 속삭여주니 솔깃했던 거지.
'석가...' 채널은 구독 취소 해야겠다.
혹시나 했던 도피처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