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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인티나인즈 May 04. 2022

상영관 뒤에 자리하는 사람들

영화 프로그래머 _ 주보라


주보라는 프로그래머다. 상영관 뒤에서 일하는 영화 프로그래머. 관객들이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시공간을 온전히 넘나들 수 있도록, 영화를 고르고 배치하고 보여 준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할 때가 있다는 그. 독립예술영화 전용 상영관 필름포럼에서 일하며 누구보다 영화의 매력을 잘 전하고 있는 주보라를 만났다. 필름포럼 커뮤니티 운영 기획자로 일하는 김성혜도 함께했다.






서로에게 영화 이야기를 가장 자주 한다는 김성혜(왼)와 주보라(오).



유보라  보라 님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는데, 저의 절친 성혜 님이 자리를 마련해주셨어요. 감사드려요. 먼저 어떤 일을 하시는지 간략하게 소개 부탁드립니다.   

  

주보라  안녕하세요. 프로그래머 주보라입니다. 필름포럼에서 상영할 영화를 고르고, 상영시간표를 짜는 일을 하고 있어요. 단체 관람객 일정을 조율하기도 하고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보내오는 공고에 응대해야 할 때도 있고요. 기획전이나 GV 같은 행사를 기획하기도 합니다.     


김성혜  저는 필름포럼에서 커뮤니티 운영기획과 공간관리를 맡고 있어요. 필름포럼과는 10여 년 전에도 잠깐 인연이 있었는데요. 다른 일을 하다가 영화가 그리워 다시 필름포럼을 찾은 지 4개월쯤 됐습니다.     





유보라  성혜 님에게서 프로그래머라는 직업이 있단 이야기를 듣고 많이 궁금했어요. 설명해 주신다면?     


주보라  컴퓨터 프로그래머는 아니고요. (웃음) 어떤 영화를 언제 어디에서 상영할지 프로그램을 짜는 사람을 프로그래머라고 해요. 영화를 볼 관객에 대해 이해도가 있어야 하는 건 물론이고, 프로그램 목적과 방향성도 명확히 해야 해요. 부산국제영화제나 전주국제영화제가 그들만의 가치관과 방향에 따라 상영작을 선정하는 것처럼요. 영화관의 경우엔 꼭 상영해야 할 개봉작들이 정해져 있을 때가 있으니 영화제의 경우보다는 프로그래머의 역할이 작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프로그래머의 판단은 중요해요.     





유보라  독립예술영화관인 필름포럼에서는 어떤 기준과 방향성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짜고 계신가요?     


주보라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선별한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더 많이 상영하고 있어요. 그냥 '예술적인 영화'라고 하면 주관적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영화진흥위원회에선 예술영화에 대한 기준을 정하고 심사를 진행해요. 상업성, 오락성이 있다고 해서 예술영화가 아닌 건 아니에요.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세운 기준에 따라 예술성을 인정받으면 예술영화로 분류되죠. 독립영화 같은 경우엔 저예산에, 소규모의 사람들이 만든 영화라는 조금 더 명확한 선이 있어요. 물론 영화진흥위원회의 인정 심사를 받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고요.     


유보라  저는 사실 독립영화와 예술영화를 하나로 묶어서 생각해왔는데, 명확한 기준에 대해 들으니 재밌네요! 성혜 님도 독립예술영화관의 이런 의미를 알고 필름포럼에 들어가신 거죠?   


김성혜  알고 들어오진 않았지만, 들어와서 알게 됐어요. 하하하.     


유보라  앗, 그럼 오늘 저와 함께 더 많이 알아봐요. (웃음) 보라 님이 프로그래머로 일하게 되신 계기도 궁금해요.   

  

주보라  원래는 영화감독을 꿈꾸며 시나리오를 써봤는데요. 영화감독이 짊어져야 하는 다양한 일들이 저에겐 넘기 어려운 벽으로 느껴져서, 시나리오 작가로 꿈의 방향을 바꿨었어요. 글쓰기와 영화 분석을 더 공부하면서부턴 영화 평론가가 되는 것도 좋겠다 싶기도 했고요. 영화제도 경험했는데요, 영화제에선 프로그래머들이 영화를 주도적으로 셀렉해요. 그걸 보며 프로그래머를 꿈꾸기도 하고. 그렇게 영화를 중심으로 계속 뺑뺑이 도는 길을 걷다가, 마침 프로그래머를 뽑는다는 공고를 보고 바로 지원했죠. 영화 프로그래머 TO는 정말 드물거든요.     


유보라  보라 님은 뺑뺑이를 돈다고 표현하셨지만, 결국 그 길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인 것 같아요. 산 정상을 향해 가려면 산을 둘러싸는 둥근 길들을 따라 올라가야 하듯이 말예요. 여전히, 영화감독이 꿈이신가요?     


주보라  꼭 그렇지는 않아요.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것들이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영화를 만든다는 창조적인 행위에 대한 꿈을 버렸다고는 할 순 없을 것 같아요. 영화는 다양하잖아요. 천만 관객을 모으는 영화도 있고, 작은 단편 영화도 있고. 어떤 형태로든 만들어보고는 싶어요.     


유보라  영화 만들기를 위해 시나리오도 많이 써보셨다고 했잖아요. 보라 님이 쓰신 시나리오는 어떤 내용이었나요?     


주보라  아이디어는 되게 많았어요. 처음엔 예술영화에 어울리는 이야기들을 많이 생각했는데, 나중엔 상업영화에 대한 존중이 생기면서 상업적인 스토리를 써보기도 했어요.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유보라  문득 궁금해졌는데요, 일반 글쓰기와 시나리오 쓰기에 차이점이 있나요?     


주보라  굉장히 많아요. 특히 소설이랑 시나리오는 둘 다 스토리 기반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쓰는 방식이 많이 다른데요. 소설에선 어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할 수 있지만, 시나리오에선 그 모든 걸 다 행위로 보여줘야 해요. ‘슬픔을 느꼈다’라고 표현하는 게 아니라, ‘울고 있다’ 혹은 ‘갑자기 땅을 친다’는 식으로 감정을 보여줘야 하죠. 그리고, 큰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야 하기 때문에 문장력보다도 관찰력, 상상력이 더 많이 필요해요.      


유보라  그렇구나. 신기해요! 그럼 프로그래머로서는 어떤 재능이 더 필요할까요?     


주보라  아무래도 영화와 관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야겠죠. 영화를 분석할 줄도 알아야 하고요. 무엇보다 시대정신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어야 해요. 지금 여기선 어떤 영화가 적절한가를 결정해야 하니까요.     


유보라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는 언제인가요?     


주보라  영화를 보고 나오는 분들 중 저에게 소감을 이야기하며 고마움을 표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제가 그 영화를 만든 감독도 아닌데 말이죠. 그게 신기하면서도 좋더라고요. 저도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의미 있을 법한 영화를 골라드린 거니까요.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감정이 벅차올랐으면, 나오면서 저에게 이야기하실까 싶어서 감사해요.     


유보라  정말 그러시겠네요. 저도 다음에 좋은 영화를 보고 나오면, 주변 직원분에게 감사 인사를 전해봐야겠어요.     


김성혜  CGV 같은 데 가서 하지는 마시고요. (웃음)     





유보라  보라 님과 성혜 님 두 분은 어떻게 영화에 빠지셨나요?     


주보라  어릴 때부터 책, 음악, 사진, 그림을 다 좋아했어요. 욕심 많은 내가 이걸 어떻게 다 누릴 수 있을까 생각해보니, 종합예술인 영화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영화 관련 일을 하겠단 목표를 갖게 됐었어요. 그런데 진지하게 공부하다 보니 한편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영화는 신의 영역에 대한 도전 같다는. 영화는 어떤 절단된 시공간으로 우리를 초대하잖아요. 전 이게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과거로 되돌릴 수 없고 미래로 가볼 수 없는 우리가 영화를 통해 자유롭게 시공간을 영유하죠. 이런 점 때문에 영화에 더 빠지게 된 것 같아요.     


김성혜  저에게는 책이 고민과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도피처였는데, 커가면서 영화도 비슷한 도피처가 되어주더라고요. 극장이라는 공간이 주는 안정감도 좋아해요. 불 꺼진 공간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느낄 수 있는 기분이요. 또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됐어요.     


유보라  정도는 달라도 각자가 영화에 몰입할 때 느끼는 감정은 비슷한 것 같네요. 저는 대학 때 영화 관련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 교수님이 영화관 커튼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거든요. 서서히 암전되고 커튼이 열리는 게 다른 세상으로 들어감을 의미한대요. 그 얘길 듣고서야 영화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알았어요. 보라 님과 성혜 님은 다양한 영화를 많이 보셨을 텐데, 그중 인생 영화를 꼽을 수 있을까요? 혹은 저에게 영화 한 편을 추천해 주신다면?     


주보라  아하하. 그건 모든 프로그래머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일 것 같아요. 왜냐면, 그냥 좋아하는 영화가 있고, 잘 만들어져서 좋아하는 영화가 있고, 여러 번 볼수록 해석이 깊어지면서 점차 좋아하게 되는 영화가 있고. 아무튼 좋아하는 영화가 너무 많거든요. 좀 더 생각해볼게요.     


김성혜  그럼 제 인생 영화를 먼저 이야기해볼까요? (웃음) 최근 제 인생에 영향을 준 영화는 <드라이브 마이 카>예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단편 <드라이브 마이 카>를 모티브로 한 영환데요. 평소 제가 자주 생각하는, 삶을 통과하며 겪는 고통에 대해 섬세히 보여주는 영화라 좋았어요. 해석의 여지도 많아 여운이 더 오래가는 것 같아요.     


주보라  저는 어렵게 어렵게 <더 파더>를 골랐어요. 작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안소니 홉킨스가 남우주연상을 받은 영화예요. 알츠하이머를 앓는 아버지와 딸 이야긴데요. 딸이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보이고 집이 갑자기 다른 공간이 되어버리는 아버지의 입장을 영화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관객이 경험하게 해 줘요. 저는 그게 너무 슬프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어요. 동시에 영화라는 방식이 갖는 힘이 대단하다 싶었고요. 자녀들은 물론, 스스로 늙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그냥, 기억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보면 좋겠다 생각해요.     





유보라  두 분의 영화 추천 감사합니다. 꼭 볼게요. 그럼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소감 부탁드릴게요.     


주보라  관객들에게 영화를 다채롭게 소개할 수 있는 특별한 자리들을 더 많이 만들고 싶어요. 영화를 통해 소통하고 싶어 하는 관객들에게 무언가 깊은 의미를 남겨줄 수 있는 걸 찾는 중이에요.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즐기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그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에 대해 계속 고민할 거예요.     


김성혜  필름포럼은 예술영화 전용관이기 때문에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후원이 필요한 곳이에요. 그런 파트에서 제가 기여할 수 있도록 내 역할을 잘 해내야겠단 목표가 있어요. 더 많은 분들이 독립예술영화에 관심 가져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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