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인종 간 평등·정의 이니셔티브 프로젝트’
처음 캐나다 밴쿠버에서 ‘닐링버스(Kneeling Bus, 저상버스)’를 경험했을 때의 벅참을 잊을 수 없다. 땅에 닿은 경사로를 따라 휠체어가 천천히 버스에 오르는 모습과 버스 기사가 휠체어를 차체에 단단히 고정할 때까지 모든 승객이 자연스럽게 기다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대중교통’에서 ‘대중’이 의미하는 바를 목도하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밴쿠버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시절, 밴쿠버 시장은 휠체어를 탄 척수 장애인 샘 설리반이었고, 캐나다는 나에게 만인이 평등한 이상 사회로 보였다.
세 번의 계절이 지났을 무렵, 티베트인 룸메이트의 소개로 캐나다 원주민 여성을 알게 되었다. 거실 주황빛의 부드러운 조명 아래서 맥주를 나눠 마시며 원주민의 이야기를 들었다. 오래 전의 침략과 폭력이 만들어낸 자상은 여전히 깊은 흉터로 새겨져 있었다. 지금까지도 원주민 보호구역 안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겪는 빈곤과 차별은 지나온 과거가 아닌 마주한 현재였다.
차별은 곧 나의 현실이기도 했다. 파트타이머로 일하던 식당에서 한 백인 여성에게 거스름돈을 잘못 내민 순간, “Go back to China!”가 내 귀에 꽂혔다. 머리털이 쭈뼛 섰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백인 사장이 올 때까지, 그 여성은 두어 번 더 소리쳤다.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인종마다 존재해야 할 구역이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존재해야 했을까? 모두 함께 닐링버스에 올라타 있다 생각한 평등사회가 허상으로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나는 유색인종인 동시에 비장애인이었다. 백인은 타자였고, 원주민도 타자였으며, 장애인도 타자였다. 캐나다는 나와 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한국 사회도, 내가 속해 있는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각기 다른 사람이었던 우리가 공존을 위해, 동등함을 위해, 유사성을 찾아내고 공유해야 했던 걸까? 다름을 은폐하고 모른 척해야 했던 걸까? 다원화된 사회 속 타자 혐오에 대한 통찰을 제시하는 책 『나와 타자들』에서 이졸데 카림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이지 않은 만남의 장이 필요하다.” 우리 시대 공존을 위한 핵심 질문은 “어떻게 동등하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를 수 있을지”라며, 우리 사회의 미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데 달려 있다고 덧붙인다.
지난해 1월, 애플은 ‘인종 간 평등·정의 이니셔티브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비백인 커뮤니티가 직면한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1억 달러를 투자하겠다는 프로젝트다. 애플이 지향하는 평등과 포용의 가치가 구호에 그치지 않도록 구체화하고 실체화하겠다는 제스처다.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게 하는, 손에 잡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움직일 때라야 잡을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렇기에 모두가 주시하는 기업 애플의 행보가 반가웠다.
과거를 반성하고 위기에 대응하는 제스처들이 하나둘씩 쌓일 때, 미래를 꿈꾸고 정의를 실현하는 의식적 행동들이 모일 때, ‘다름이 동등하게 만날 수 있는, 추상적이지 않은 만남’이라는 추상적 표현이 우리에게 현실로, 기회로, 일상으로 다가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