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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y Mar 19. 2018

<내일로> 경주

2015. 7.16 목요일. 흐림.

  “미친놈. 잘 다니던 피자집을 왜 도망 나와.”

  “몰라. 암튼 잘 다녀올게.”

  “밥 챙겨 먹고 댕겨. 이모가 돈은 못준다. 가서는 다 내려놓고 오니라. 알았나?”

  “그려. 간다이!”

  “조심히 갔다 온나!”

집을 나섰다.

창원중앙역에 오다. 도착해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충전기를 안 챙겼다. DSLR이 아닌 오직 스마트폰으로만 사진 찍는 나에게 충전기는 없어서는 안 될 물건이다. 사진도 찍어야 하고 지도도 봐야 하고 전화도 써야 하니까. 다시 집에 가기엔 시간이 너무 애매해 그냥 경주 가서 하나 사기로 결정하다. 확인하고 또 확인했어야 했는데.......

열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오전 8:29. 탑승해 미니카페칸 바닥에 털썩 주저앉다. 옷은 집에서 가장 버려도 될 것 같은 옷들만 골라 가져왔기 때문에 내가 어떤 식으로 자세를 취하든 상관이 없다. 심지어 누워도 된다. 이제껏 어디 외출하면 슬랙스 바지와 셔츠를 입고 잘 닦인 구두를 신고 갔는데 지금 나는 다이소에서 산 밀짚모자를 쓰고 이모부의 낡은 셔츠와 헐렁해서 잘못하다간 흘러내릴 것만 같은 반바지를 입었다. 그야말로 여행자, 아니 비렁뱅이가 된 것 같다.

미니카페 자판기 옆에 퍼질러 앉아 다음 지도로 경주 LG전자 매장을 검색해보았다. 경주역에서 내려 우체국 쪽으로 쭉 걸어가면 사거리가 나오는데, 거기에 매장이 있다. 애써 선택한 여행을 휴대폰 하나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충전기와 배터리를 사기로 결정했다.

옆에 두 여자도 내일러인가보다. 나를 힐끔힐끔 본다. 자기들끼리 수군대는 말이 들린다. 

“여기서 어떻게 자.”

“원래 내일러 되면 이런데서 자고 그러는 거야.”

암. 그렇고말고. 

기차는 삼랑진을 지난다. 예전에 진주 대학 친구들을 볼 일이 있어 잠깐 갔다가 돌아오는 열차에서 졸았다. 눈떠보니 삼랑진이었다. 그때 방송을 듣고 급히 내려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역무원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은 기억이 난다. 다행히 밤 기차가 남아있어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여기서 아버지는 경찰시험에 붙으시기 전에 철길 막일을 하셨다.

“아빠가 예전에 삼랑진에서 니 낳기 전에 엄마랑 방 한 칸 구해가 철길 노가다 한 적이 있는데, 와 내 살믄서 그리 힘든 일은 또 처음이라. 하루는 네 명이서 밧줄로 철근 묶고 낑낑대믄서 댕기는데 잡아당겨도 안땡기지는기라. 그걸 헥헥대고 있는데 떡대 넓은 놈이 와가꼬 내한테 글카데. 아요. 일을 하자는 거요, 말자는 거요? 그래가 글마가 와가꼬 밧줄 잡더니 쑥 끌어버리는 거라. 와 힘세데... 그래가 하루가 가믄 진이 다 빠지가 죽을꺼같은기라.......”

기차는 그 철길을 달린다. 이 아래일까, 저 언저리일까. 이 근처 어느 곳에서 이십여 년 전의 아버지가 철근을 끌고 있었다.

경주 도착시간은 11시 35분이다. 이제 삼십 분 지났고 아직 두 시간 반 정도 더 가야 한다. 노선상 창원에서 경주 쪽으로 가는 게 아니라 부산을 거쳤다가 간다. 앞으로 이 지루함을 달랠 어떤 것이 있어야 될 듯하다. 그렇다고 편의점에서 맥심을 산다거나 하진 않고 그냥 끊임없는 생각들을 하기로 했다. 오늘은 돈 문제를 걱정해보자. 여행은 둘째치고 여행 이후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

주말 알바를 하면 못해도 41만 원을 벌게 된다. 보험 5만, 통신 5만, 이모집 월세 10만. 그러면 무려 21만 원이 남는다. 그러니 최저임금 주는 곳이라면 주말 알바를 해도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주중 하루 일하면 너무 적다. 일주일 2~3일이 적당한 것 같다. 현재 카드값이 60만 원을 초과했다. 계좌는 아직 91만 원이 남아있다. 휴대폰 배터리 등 사면 81만, 게스트하우스 예약금 빼고 이번 여행 목표는 넉넉잡아 50만 원 남기기.

이모는 나에게 내려놓고 오라고 했다. 나의 마음의 짐의 무게는 아직 가득한 걸까.



“이제 좀 알 것 같네요.”

상담 선생님은 얘기를 다 들으시고 웃으며 말씀하셨다. 시내 한 오피스텔 3층 건물. 창은 옆 건물로 가려져 있다. 창이 막혀있는 공간은 차가울 것 같은데 이 공간은 따뜻하다. 

“녹차 한 잔 더 줄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말하기 힘든 이야기 해줘서 고마워요.”

일주일에 한 번, 적지 않은 돈을 내면서 상담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던 건, 더 이상 이럴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다시 대학을 가 보겠다고 아침 일찍 일어나 수능 공부하고 마트에 일하러 가서 오토바이 몰다가 퇴근 후 공부하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던 때, 수학 문제를 풀며 고시원에 앉아있다 어떤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밀려와 펜을 잡을 수 없었다. 이제껏 참아왔지만,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찾은 곳이 사설상담소였다. 

이인선 선생님은 미소가 아름다운 분이었다. 저런 미소를 지으려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해야 할까. 그 미소 하나만으로 바쁜 시내 한가운데 있는, 햇볕도 잘 안 들어오는 오피스텔 한 칸이 따뜻해졌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 오늘로서 여섯 번째 방문이다. 방금 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무거운 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죄책감과 두려움에 떨었다. 머릿속에서 불편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상담치료를 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부분이다. 평생 달고 살아야 되는 걸까.



잠시 선잠이 들었었다. 

페북을 켰다. 어떻게 알았는지 새로 판 계정에 피자집 점장 형님이 들어와 메시지를 보냈다.

[내 상식이형인뎈ㅋㅋㅋㅋㅋ 니 존나 그렇게 안 봤는데 어마어마한 썅년이네. 알바째고 도망가서 여행댕기니까 좋낰ㅋㅋㅋㅋㅋㅋ 씨발새끼야 그리 사는거 아이다 알겠나 ㅋㅋㅋ 왜 그랬는지 얘기나 들어보자 전화한통해라 반드시 살아돌아온나 ㅋㅋㅋㅋㅋ]

폰을 껐다. 어마어마한 썅년. 타인에게 객관적으로 들은 나의 호칭. 

“행님, 자룡이 같은 아를 저한테 붙이셔야 합니다. 얼마나 성실합니까.”

한때 정말 서로 신뢰하고 나를 너무 신임해서 나 같은 사람과 일하고 싶다고 사장에게 청했던 사람이다. 그렇게 좋았던 관계였는데....... 한 순간에 파탄이 났다.



오전 11:40. 경주 도착. 다음 지도를 켜서 찾아놓았던 LG전자 대리점에 갔으나 배터리는 따로 파는 판매점으로 가야 한단다. 물어보니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일단 밥부터 해결해야겠다 싶어 주위를 둘러봤다. 경주는 밀면이 유명하다. 진짜 70년대에 개업했던 건물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 같은 밀면집에 들어가다. 곱빼기 5천5백 원. 일단 양이 굉장히 많다.

짐을 내려놓고 LG전자 매장을 찾아가기 전 근방에 영화 <경주>에 나온 아리솔 찻집이 있다 해서 그곳으로 향했다. 박해일과 신민아가 차를 마시던 공간은 어떤 곳일까. 조금 걷다 나온 아리솔 찻집은 아쉽게도 휴무이다. 생각보다 작아서 놀랐다. 뒤뜰이 보이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작다. 스크린에서는 크게 보여서 규모가 있는 공간인 줄 알았는데 생각 밖이다. 조그마한 집의 정원 정도 되려나.

외국인 노동자가 정류장에 앉아있다. 날 보고 먼저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한다. 한국에 돈 벌러 왔다고 한다. 국적은 미얀마, 이 근처 공장에 다니고 있다고. 용강 사거리까지 가려면 얼마나 가야 되냐고 물으니 저쪽으로 버스 타고 쭉 가란다. 몇 번을 타야 되는지 물으니 그것까진 모르겠다고. 노선도를 보며 몇 번을 타야 될지를 찾다. 참 해맑게 웃는다. 타국에서 생활하는 게 쉽진 않을 텐데.......

용강 사거리 LG전자 매장에서 배터리를 사고 불국사로 향한다. 버스를 타자 웬 아주머니가 난데없이 버스 안에서 어디 가냐고 묻는다.

“불국사 갑니다.”

“아 그래요. 불국사는 경주역에서 환승해야 될 텐데. 내가 그쪽 지나가니까 내려야 될 때 말해줄게요. 여행 다니세요?”

“네. 이번에 전국을 좀 돌려고요.”

“멋있네요. 젊을 때 그렇게 많이 다녀야 돼요.”

“감사합니다. 되게 친절하시네요.”

“아유 저는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어 탈이에요.”

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웃으셨다. 

경주역에서 내려 환승하다. 여기서 불국사까지는 꽤 멀다. 무려 한 시간이 걸린다. 당일이나 일박이일의 일정이었다면 한 시간 한 시간이 아까웠을 테지만 보름간의 일정이고 급할 게 없는 여행이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생각하자.

중간중간 고분이 보인다. 경주는 정말 이상한 동네인데 가다 보면 떡하니 무덤이 있다. 시장 한가운데도 있고 초등학교에도 있다. 도시 전체가 묘지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일을 하고 아이들은 뛰어놀고 연인들은 사랑을 나눈다.



불국사 입장료는 4,000원. 불국사와 석굴암은 개별 사찰이라 입장료를 따로 받는다. 석굴암 역시 4,000원.

불국사는 임진왜란 때 일본이 불 지르고 갔고 폐사지로 남았다가 1970년대에 복원되었다. 보통 절에 가면 평화롭다는 느낌인데 이곳은 정말 웅장하다. 부처님의 궁전에 온 느낌이다. 처음 대웅전에서 삼배하고 둘러보다 한 보살님이 집무를 보시는 곳에서 제대로 된 삼배법을 여쭈었더니 정석으로 가르쳐주셨다. 삼배를 하며 정말 오랜만에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존재에게 마음의 짐을 덜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불국사를 둘러보고 석굴암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다. 현대 석굴암은 일제강점기 때 우체부에 의해 발견되어 도굴되고 무식한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되었다가 박정희 정권 때 말도 안 되는 방식으로 개축되었다. 습기가 차서 벽이 갈라지는 등 상태가 말이 아니라고.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울 거라는 희망을 품고 가다. 버스는 십 오분 정도 끝도 없는 언덕길을 올라 석굴암에 도착했다. 초입부터 절로 들어가는 길이 예전 통영 여행을 갔을 때 한산도를 방문했던 첫 느낌과 비슷하다. 입구를 지나온 지 한참 됐는데 또 꼬불꼬불한 길을 한참 걷는다. 한 여름날인데도 바람이 심하게 불어 춥다. 

본존불은 아름다웠다. 저렇게 바른 자세로 평안히 가부좌를 틀 수도 있구나. 꼭 금칠을 하지 않아도 빛날 수 있구나.

길을 내려온다. 바람이 세차다. 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가 시끄럽다. 버스를 타고 역 앞 시장에서 내렸다. 시장에서 먹을거리를 찾다 보니 반찬을 깔아놓은 집이 보였다. 오자마자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매요. 얼맙니까?”

“오천 원.”

결제를 하고 물었다.

“여게 전기 쓸 수 있는데 없어요?”

“저짜게 있네.”

“어데요?”

“저짜게.”

내가 못 찾자 할매가 짜증이 났나 보다.

“아이고 아재야! 그짜게 말고 저짜게라꼬.”

“아요 할매. 내는 여게가 처음인디 모를 수도 있지요.”

할매는 말없이 밥을 퍼준다.



뷔페식인데 저 많은 반찬 그리고 소고기 국이 단돈 5천 원이다.

“국 더 주까.”

할매의 인심이 넉넉해서 국을 다 먹었는데 또 퍼주신다. 마지막에 요구르트를 서비스로 준다. 



동궁과 월지(구 안압지)에 오다. 야간개장은 21:30 까지. 

야간개장의 동궁과 월지는 상당히 아름답다. 궁 아래 호수가 있고 그 둘레로 산책길이 펼쳐진다. 경주에 있는 모든 문화재가 그렇지만 동궁 입장은 경주시민들에겐 무료라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궁 너머 밤에 피는 연꽃밭을 지나 첨성대를 향해 걸었다. 너무 예쁜 산책길이다. 이런 곳에서 살면 맨날 이런 장면을 보고 운동할  수 있는 경주시민들이 부럽다.


아마 영화 <경주>에 나왔을법한 고분들이 보였다. 경비한테 혼났던 곳. 이 도시는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이 완벽히 공존하는 곳이다. 논밭 위에 조명도 없이 덩그러니 있는 고분도 많다. 그중 하나에 올라갔다.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한참 그러고 있다 뛰어 내려왔다. 기분 좋아서 미친 듯 낄낄대다가 갑자기 북받쳐서 엉엉 소리 냈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게스트하우스 도착. 게하라는 그 특유의 느낌보다는 호텔 느낌이 강하다. 시설 자체도 그렇고 무엇보다 하나하나 돈 받고 판다. 심지어 물품보관함조차도. 조식 역시 유료다. 지하에 라운지가 있지만 왠지 가고 싶지 않아 근처 편의점에서 홀로 순하리를 샀다.

이 술 마시고 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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