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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y Mar 19. 2018

<내일로> 안동, 정동진

2015.7.18 토요일. 비가 올 것 같을 정도로 흐림.

도수 높다고 소문난 안동소주를 어제 꽤 많이 마신 것 같은데 숙취가 전혀 없다. 사모님께 손톱깎기를 빌려 마당에서 손발톱을 깎다. 이곳에는 개처럼 사람을 잘 따르는 고양이 한 마리가 사는데 오늘 아침 그 녀석은 남들이 보든지 말든지 정원 한가운데 수레에 대자로 뻗어 있다. 손을 뻗자 야옹 소리 내며 다가온다. 이름이 뭐냐고 주인아주머니께 여쭈었다.

“야옹이”

“네?”

“이름이 야옹이라고.”

야옹이랜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조식으로 제공되는 미역죽을 먹으며 노트를 기록한다. 고소하다. 건너편 책장엔 참 다양한 책들이 꽂혀 있는데 니코스 카찬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를 발견했다. 스무 살 적 나의 가치관을 흔들었던 책이다. 게다가 두 권이다. 한 권은 영어 원서, 한 권은 해설본. 오랜 친구를 다시 만난 느낌이다. 또한 마트 알바하면서 틈틈이 읽었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와 삼국지 이문열 역본, 소설 동의보감이 있다. 옛 친구들을 본 것 같아 너무 반갑다. 아침식사를 끝낼 때쯤 어제 술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들이 나와 하나 둘 제 갈 길을 간다. 난 아홉 시 이십 분 차를 타고 안동역으로 갈 예정. 기차는 오후 한 시에 떠나는데 그동안 안동 시내를 걸을 계획이다.

사장님이 역까지 픽업해주시다. 같이 내린 동행은 두 명인데, 둘 다 기차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근처 벽화마을로 다 같이 향하다. 윤미와 다솜.

내가 다솜에게 말했다. 

“누나. 근데 그 그림 알아?”

“무슨 그림?”

“꼭 그거 같아. 잠시만...”

그림 이름이 기억 안 나서 스마트폰으로 직접 찾아 보여주다. 에두아르 마네가 그린 <피리 부는 소년>. 보여주

니 웃는다. 


벽화마을은 그렇게 아름답진 않다. 통영 동피랑을 비롯한 이 곳 저곳 벽화마을들이 뜨자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에서 만들었다는 느낌. 게다가 언덕길이 너무 가팔라 관광이 아니라 등산이 되어버렸다. 

평상에 앉아 일지를 기록하니 옆에서 두 명이 빤히 바라본다. 내용이 궁금한가 보다. 빨간 바지와 윤미에게 일지를 보여주다. 둘은 평상에서 내 일지를 구경하며 중간중간 킥킥댔다.

“되게 신기하다. 이걸 어떻게 다 기록했니.”

빨간 바지가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앞부분을 보여달라고 떼쓰는 걸 겨우 말렸다. 자유롭게 쓰는 일지다 보니까 욕설, 음란한 생각 등이 거침없이 서술되어 있는지라 보여주기 껄끄럽다. 발가벗고 서 있는 느낌이랄까.



빨간 바지는 경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안동 와서 찜닭도 못 먹고 떠나면 아쉬워서 못 견딜 것 같아 윤미를 꼬드겨 찜닭골목으로 가다. 둘이 먹기에 한 마리는 양도 많고 가격도 부담스러울 것 같아 반마리 주문이 가능한 집을 찾다. 

“여기 찜닭 반 마리요.”

주문을 하자 옆 테이블 여성 두 명이 우리 주문을 듣고 사장님을 부른다.

“저희 한 마리 시켰는데 반 마리로 해주시면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이미 한 마리가 솥에 들어갔는데요.”

옆에서 듣다가 좋은 생각이 나서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다면 합석하실래요? 네 명이서 한 마리면 딱 맞을 것 같은데요.”

“아 정말요?”

두 사람의 표정이 환해진다. 사장님께 여쭤보니 우리 닭 반마리는 아직 솥에 안 들어갔단다. 윤미와 테이블을 옮기다.

두 사람은 20대 후반이며, 사는 곳은 부산이고, 직장인이다. 1박 2일로 안동 여행 왔단다. 찜닭이 나오자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다.

“너 정말 전투적으로 먹는구나.”

윤미가 나에게 말했다.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부산 누나가 말했다.


안동에 와서 찜닭을 못 먹고 가면 아쉬워서 못 견딜 것이다.


역에 도착해 각자의 기차를 기다린다. 강원도로 향하는 열차 도착 안내방송이 들린다. 윤미와 인사하고 열차에 올라타다. 

빈 좌석 발견. 한 아주머니와 같이 앉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먼저 인사를 건네자 환하게 웃으며 답해주신다. 

아주머니가 말한다.

“여행 중이신가 봐요.”

“네. 전국을 돌고 있는 중입니다. 어디서 오시는 길이세요?”

“울산에서 서울로 가고 있어요. 6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 돼요.”

“많이 피곤하시겠군요.”

“우리 아들이 울산 조선소에서 용접공으로 일해요.”

“그러시군요.”

“모아둔 돈이 꽤 됐는데, 얼마 전에 아들 장가가서 차하고 집하고 사줬어요.”

“많이 부담되셨겠는데요.”

“이제 남편하고 나는 나이만 먹는걸요. 해줄 수 있을 때 다 해주고 싶어요.”

아주머니는 행복한 듯하다. 자녀를 다 키웠다는 기분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옆 자리 앉은 아이는 신이 났는지 자기 형이랑 기차 안을 뛰어다닌다. 안녕하고 인사하자 웃으며 다가와 씩 웃는다.

열차는 계속 달린다. 석포역까지는 경북, 철암역부터는 강원도다. 오지역으로 유명한 승부역을 지난다. 계곡이 정말 아름다워 내릴까 말까 고민했지만 다음 기회에 방문하기로 하다. 승부역은 기차 이외의 교통편이 전무한 오지역인데, 이 곳에 올 때는 캠핑장비를 꾸려오는 게 좋다.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 태백시 간판이 보인다. 지금부터 강원도다. 미니카페 칸에서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본 지 삼십 분 정도 되었다. 자판기가 고장 나 있는데, 자판기에 과자가 걸려있다. 기계를 살짝 쳤더니 화이트하임이 툭 떨어졌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돈 내고 샀으면 천사백 원짜리 과자다. 가방 안에 슬쩍 집어넣고 모른 척 삼 분정도 있으니 웬 꼬마와 엄마가 작동도 안 되는 자판기에 돈을 집어넣고 있다. 고장 났다고 말하니 아이의 표정이 울상이다. 가방 안에 넣어둔 화이트하임을 셋이서 나눠먹었다. 

홀로 미니카페에서 여행 계획을 수정했다. 아까 승무원님께 여쭤본 바로는, 본래 영동선의 종점은 강릉역이었으나 원주-강릉선 공사로 인해 정동진역이 종점이란다. 평창올림픽이 열릴 때쯤에야 공사가 끝날 계획이란다.



17:17 정동진 도착. 어릴 적 가족여행으로 두 번 와본 적이 있다. 저 멀리 커다란 배 모양으로 지은 썬크루즈 리조트가 보인다. 아버지께 전화드렸다.

-아버지, 자룡입니다.

-응. 그래. 어디고?

-정동진이요. 저번에 가족여행 갔을 때 갔던 데가 저짜게 보이네요. 왜 그 커다란 배 모양 호텔 있잖아요.

-응 그래그래. 좀 어떻노. 좋나.

-아직 삼일밖에 안돼서 잘 모르겠어요. 한 열흘 잡고 다니는 거니까는 더 다녀봐야 알 것 같아요.

-그래. 잘 선택했네. 다닐 수 있을 때 많이 다녀봐야 된다. 전국일주는 아빠도 못해봤는데 니가 다 하네.

-그니까는.

-어쨌거나 밥 잘 챙기묵고.

-네, 또 연락드릴게요.

-오야.


IF 게스트하우스에서 짐을 풀고 사람들과 인사하다. 여행에서 사람들과 친해지는 마스터키는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묻는 것이다. 8인실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23(남) 군 제대, 23(남) 군 제대 직전. 둘은 동기.

32(남) 서울. 여친과 동행

22(남) ROTC. 여친과 동행

25(남) 대구, 25(남) 대구. 친구며 안동에서 대학 다님.

35(남) 마누라와 싸우고 혼자 여행 옴. (.......)

IF 게스트하우스는 만 오천 원을 내면 삼겹파티 참여가 가능하다. 스무 명이 좀 안 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처음엔 각자의 테이블에서 어색하게 술을 마셨다. 소주 한 병을 비울 때쯤 사람들은 이 자리 저 자리 옮겨 다니기 시작했고, 두 병을 비울 때쯤 모두가 십 년은 알고 지낸 사이처럼 서로를 대했다. 그중에 나는 특히나 떠들어댔다.



“내가 생각할 때, 이 분은 게스트하우스 매니아야!”

마누라와 싸우고 여행 온 행님이 내 어깨를 감싸며 말했다. 백사장으로 2차를 갔고, 난 오늘 처음 본 여자의 어깨를 감싸고 나랑 연애하자고 들이대고 있었고, 그녀는 내 어깨를 밀치며 나와 잡기 놀이를 했다.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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