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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ny Mar 19. 2018

<내일로> 태백, 추암

폐광

2017.7.20 월요일. 비.

아침. 기분 좋게 기상 후 빨래를 걷으러 지하를 나왔는데 주룩주룩 비가 온다.

젠장.

온돌방에 그냥 깔아놨으면 어련히 말랐을 빨래들을 괜히 밖에다 널어 일을 만들고야 말았다. 어쨌든 말려야 한다. 드라이기로 한참을 말렸는데, 드라이기가 열을 너무 받아 멈춰버렸다. 선풍기로 남은 물기를 어떻게든 말리려고 노력하다. 

나의 루트를 따라가 봤을 때 비는 금요일에나 갠다. 일기예보가 틀리기만을 바랄 뿐이다.

비가 그쳤다. 오늘 태백에서는 비가 안 올 듯하다. 짐을 챙겼다. 인사를 드리고 가려했으나 사장님이 부재중이시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서 태백역 역무실 도착. 무전 용어가 들린다. 군대 행정반에 앉아있는 느낌이다. 기다리고 있으니 또 다른 내일러 두 명이 들어왔다. 커플이다. 역장님 말씀으로는, 금일 안개가 많이 껴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므로 바람의 언덕을 올라가도 제대로 된 풍경을 구경하기 어렵단다. 그래도 여성분은 꼭 가고 싶어 한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번이 두 번째 태백 여행인데 저번에도 기상 때문에 못 가봤단다. 그러나 지금 산에 올라가도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역장님, 부역장님, 역무원들께서 합심하여 그 여성분을 설득했다. 결국 추전역을 지나 용연동굴로 향하다.

부역장님이 직접 운전하시는 차는 안개 사이로 달린다. 부역장님께 몇 가지 여쭤보다.

“원래 태백역 내일로 발권자가 많이 없나요?”

“있는 편인데, 여름보단 겨울에 많아.”

“그렇군요. 과거 태백은 굉장히 발전한 동네였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지. 80년대까지만 해도 탄 캐러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살았기 때문에 부자동네였어. 지금은 완전히 망했지.”

“그래도 관광산업으로 발 빠르게 전환한 것 같네요.”

“그렇지. 그거 아니었으면 이 정도 사는 것도 힘들었을 거야.”

차는 안개가 가득 낀 오르막길을 지난다. 같이 타고 있는 커플은 서울 출신이고, 강원도를 돌아 오늘 정오에 춘천으로 향한단다.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고 말해보았으나 차 시간이 애매해서 힘들 것 같다고 한다.

추전역에 오르자 바람개비들이 가장 먼저 우리를 반긴다. 해발고도 850m. 남한에서 제일 높은 역인데, 북한에는 추전역의 두 배 가량 되는 높이의 북계수역이 있다고 한다.  추전역은 여객열차가 정차하지 않기 때문에 가고 싶다면 따로 시내 교통을 이용해 가야 한다. 대합실 안에는 관광객이 입어볼 수 있도록 역무원 의상이 마련되어 있다.


오늘만큼은 역장!


용연동굴 매표소에 나를 내려주고 모든 일행은 시내로 돌아갔다. 원래 매표소에서 용연열차를 타고 올라가지만 오늘 비가 와서인지 아니면 사람이 나 밖에 없어서인지 운행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하고 기다리고 있으니 공무원 차가 한 대 온다. 차를 타고 올라가자 동굴 입구가 나온다. 입장 안내를 듣다.

“짐이 있으시면 사무실에 맡기고 가시고요, 헬멧 꼭 쓰셔야 됩니다.” 

“꼭 맡겨야 되나요? 어차피 가방 안엔 노트밖에 안 들어있는데요.” 

“힘들걸요.”

당장은 몰랐지만 이후 동굴 내부를 헤매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해발고도 920m. 대한민국 최고 높이의 동굴이며, 건식 동굴이다. 지금이 한여름이라는 걸 잊게 만들 정도로 동굴 안은 춥다. 바람막이를 챙겨 온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이 만든 예술품들. 


음악분수도 있다. 


동굴을 걷고 또 걸으니 왜 안전모를 쓰라고 했는지 알만한 공간들이 나왔다. 170cm가 안 되는 나조차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되는데, 어느 곳은 심지어 기어가야 겨우 빠져나갈 수 있다. 전체 루트는 1km가 조금 넘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걷고 기고 걷다가 숙이고 걷다 엎드리고를 반복하니 꽤 오래 걸린다. 지친다. 내 가방은 동굴 이곳저곳에  부딪혀 상태가 말이 아니다. 호흡이 조금 힘들어지는 시점에 출구가 보였다. 밖으로 나오자 더운 공기가 확 와 닿다. 습기가 안경을 덮었다. 안전모를 반납하고 쉼터로 들어가 앉아 숨을 고르다. 

내려가서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시내로 돌아와 시장 순대국밥을 먹다. 7천 원. 36년 된 <영화집>이라는 곳이다. 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라고 한다. 주 메뉴는 소머리국밥인데 순대국밥도 판다. 소머리 육수에 돼지순대를 넣는 조금은 독특한 방식으로 조리하는데 육수 자체가 맛있어 간을 따로 하지 않아도 잘 넘어간다. 맛집으로 소문나자 방송사, 신문사 등에서 전화가 계속 온단다. 사모님께 여쭈었다.

“아니 그 좋은 제안을 왜 거절하십니까?”

“요새 보이스피싱인가 뭔가가 판을 치지 않는가. 사기 치려는 놈들 천지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보이스피싱 얘기가 나오자 사장님과 사모님이 그 주제로 한참을 욕을 하신다. 난 말없이 남은 국밥을 국물까지 싹 비웠다.

국밥집을 나와 근처 편의점에 들러 길을 여쭈었다.

“여기 철암역으로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해요?”

“요 앞 정류장에서 길 건너지 말고 1번 버스 타세요.”

“언제쯤 오죠?”

“글쎄요? 언제쯤 오지?”

사장이 아르바이트생에게 묻는다.

“버스요? 제멋대로 오는데요?”

아르바이트생, 사장과 내가 모두 그 말에 박장대소했다. 편의점을 나와 가르쳐 준 정류장으로 가서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여쭈었다.

“여기 철암역 가는 버스는 언제쯤 와요?”

“저거 타면 돼!”

“저... 저거요?”

옆에 있는 아저씨도 돕는다.

“그래 저거 타소!”

옆에 있는 아줌마도 돕는다.

“얼푼 타소!”

온 동네 사람들이 도와준다. 사람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고 버스에 탑승했는데 마치 태백 시장이 된 기분이다.

“아이고 요금이 다 떨어졌네.”

“제가 찍어드릴게요.” 

버스 안은 정말 정겹다. 할머니의 요금을 그 뒤에 아주머니가 웃으며 대신 찍어준다. 이웃인 사람들이 정겹게 얘기하며 시내버스는 달린다. 

철암역에 도착하다. 가랑비가 폐허를 덮는다. 역사촌이 휴무인 탓에 관광객도 없다. 거대한 채석장에서 나는 작업 소음이 주변에 퍼진다. 스산하다. 



폐가가 되어버린 집들과 상가들.

정부 정책으로 인해 주원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는 80년대 말부터 사람들은 이 곳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폐상가 뒤쪽으로 가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판잣촌이 있다. 사실 현재 크기보다 훨씬 넓었지만 태풍 루사로 인해 모두 소실됐단다. 현재 남아있는 상가 등은 시에서 40억 원을 들여 그나마 유지한 것이라고.



마을 곳곳의 벽화. 저 광부들은 우리 아버지들의 자화상이 아닐까.

마을을 걷고 있던 도중, 마실 나오신 할머니 한 분을 뵙다.

“안녕하세요.”

“웬 총각인가?”

“저는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다 망한 동네 뭐 볼 게 있다고 오는가.”

허허 웃으신다.


올해 팔순이신 박필수 할머니.

“어딜 그렇게 가십니까?”

“저쪽 경로당 놀러 가지.”

“그러시군요. 동행해도 될까요?”

“그러시게.”

할머니와 같이 걷기 시작했다.

“할머님께서는 언제부터 철암에 계셨어요?”

“난 육십 년대부터 있었어. 원래 저 아래 밀양 있다가 이쪽으로 시집왔지.”

“그러면 여기가 한참 잘 나가는 동네였을 때도 계셨겠어요?”

“그렇지. 그때는 돈 잘 벌었어. 광부들도 많았고.”

“그때 어떻게 사셨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저쪽 채석장에 가서 내가 보따리 장사를 했거든. 60년대에 여기 와서 80년대까지 했어. 저쪽 판자촌에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살았거든. 밤만 되면 요 앞 거리가 바글바글했어. 이 좁은 데서만 3만 명이 살았으니까.”

“광부들은 어땠나요?”

“일이 너무 힘들어. 그렇게 일하고 하루 일당 받은 걸로 술 먹고 여자 만나고 그랬지. 지금 저 공터가 원래 시장이었어. 철암시장. 저기에 다 모였거든. 근데 태백시에서 재작년에 도로 넓힌다고 철거를 했다고. 사람이 안 사니까.”

할머니는 공터를 보시며 한숨을 쉬셨다. 아쉬움이었을까.

“여기가 80년대 말 들어서면서 폐허가 되기 시작했잖아요.”

“그렇지. 싹 다 떠났어.”

“그럼 보따리 장사하신 이후엔 어떻게 사신 거예요?”

“광부들이 없으니까 장사도 안 되고 해서 황지 나가서 식당일을 했어. 우리 집 영감이 나한테 돈을 가져다준 적이 없어. 맨날 노름하다 돈 까먹고 집에 십 원짜리 하나 가져다준 적 없어.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오고 그랬어. 아들 하나 딸 둘 있는데 영감이 돈 안 갔다 줬는데도 다 공부시켰어.”

“고생하셨네요.”

“그래서 여기 허리가 휘었잖아. 병원 가도 치료가 안 된대.”

굽은 허리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허허 웃으신다. 할머니의 느린 발걸음에 맞춰 걷는다.

“영감님은 아직 살아 계시나요?”

“죽은 지 꽤 됐어. 십 년 됐지. 요 앞 언덕에서 자빠졌어. 그래 가지고 걷지를 못하니까 앰뷸런스 불러가지고 병원에 갔더니 중풍이라고 병원비만 8천을 달라는 거야. 어쩌겠어. 치료받아야지. 그 돈 쓰고 살려 보려고 했는데 안되더라고. 영감 그렇게 가고 아들이 대학원에 가고 싶다 해서 4천 줬지. 평생 모아 둔 돈이 1억 4천인데 그러고 나니까 2천이 남는 거야. 남는 걸로 집수리를 해야겠더라고. 그래서 집수리하는 걸로 2천 가량 쓰니까 수중에 남은 돈이 40만 원이었어. 뭘 할까 생각하다가 동네 할머니들 불러가지고 황지로 가서 술을 원 없이 마셨어.”

“평생 버신 돈을 다 쓰셨네요.”

“그렇지. 그러고 지금까지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살고 있어. 허허.”

무슨 말을 해 드려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무슨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저 경로당 가는 길에 말동무나 되어드리면 족할 것 같았다. 언덕 아스팔트로 모여든 가랑비가 아래로 흘러내려간다. 나의 눈가엔 조그마한 눈물이 맺혔다.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훔쳤다.

“그래도 우리 아들 딸들이 다 잘됐어. 아들은 서울서 증권회사 다니고 딸은 고액과왼가 뭔가를 해서 돈 잘 번대.”

“고생하셨어요.”

“자네도 뭘 하든 열심히 해봐. 자네는 어떤 일을 하나?”

“저는 글을 좀 써보려고요.”

“그것도 열심히 해봐. 열심히만 하면 뭐든 잘 될 거야.”

“네. 고맙습니다.”

걷다 보니 경로당 건물 앞이다. 할머니께 인사드렸다.

“건강하시고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담에 철암 오면 우리 집 놀러와. 내가 줄 건 없어도 커피라도 한 잔 타 줄 테니까.”

미소를 보이신다. 지금에서야 봤지만, 할머니의 눈가에도 눈물이 고였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비가 추적추적하게 내린다. 가랑비는 조금 굵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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