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역으로 돌아오다. 친절히 대해주신 직원 분들께 인사를 드리고 플랫폼에 앉아 충청도로 향하는 열차를 기다리다.
서술을 하다 보면 언어의 한계를 느낀다. 아니, 언어는 충분한데 그걸 표현할 재량이 부족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평생의 경험 중 철암에 가본 것이 정말 대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을 제대로 표현할 재능이 없다. 철암뿐 아니라 수많은 여행지들도 그렇고 비단 여행뿐 아니라 삶의 단편의 느낌조차 언어로 표현하면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연습이 덜 돼서일까. 솔직히 말하면 난 그 순간의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조차 게을렀다. 난 얼마나 부족한 인간인가. 얼마나 더 느끼고, 얼마나 더 배우고, 얼마나 더 생각하고, 얼마나 더 써야 할까.
기차에 올라타다. 태백역을 떠난다. 아마 살면서 적어도 한 번은 다시 이 도시를 방문하지 않을까. 창밖을 바라보며 노트를 정리하다. 혼자 여행해서 그런지 생각하고 사색하고 기록하는 데 자유롭다.
문득 하나 궁금한 점이 생기다. 역에 도착할 때마다 노트에 스탬프를 찍고 있는데, 이 스탬프는 모든 역에 구비되어 있는 것일까? 마침 직원 한 분이 미니카페에 앉아있는 나에게 검표를 요청했다. 검표 후 여쭈어보았다.
“혹시 이 스탬프가 모든 역에 비치되어 있나요?”
그냥 단순한 궁금증일 뿐이었는데 전화까지 걸어 확인해주신다. 잠시 기다렸다.
“확인해보니까 대부분 있는 것 같군요. 방금 전화 건 곳이 아주 외진 곳에 있는 역인데 스탬프가 있답니다.”
“그렇습니까. 감사합니다.”
승무원님은 미소로 화답하고 다음 칸으로 가셨다. 대부분 있다니까 앞으로 내리는 역마다 찍어야겠다.
카페 칸으로 왔다. 노래방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직원 분은 물건을 팔고 사람은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한다. 좀 조용한 곳을 찾고 싶지만 객실에 앉아서 가지 않는 이상 그런 공간을 찾긴 힘들다. 뭔가를 사 먹어 보려 매점을 기웃거렸지만 한 푼이 아까운 가난한 여행자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
가판대 직원분이 말을 걸어 주셨다.
“내일로 세요?”
“네. 여행 중입니다.”
“노트로 기록을 하는 거예요?”
“여행 중에 한 사색이나 사건 등을 기록하고 있어요.”
“멋지네요. 요즘 젊은이들은 이렇게 까진 안 하는데. 어린 나이에 인생을 생각하기는 쉽지 않거든요. 옥수수 드실래요?”
간식으로 챙겨 오신 옥수수를 나눠주신다. 같이 먹으며 승무원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했다. 여행 경비 절감 비법, 한국철도공사의 이모저모, 추천 여행지 등등.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너무 좋다.
여행지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항상 용기의 문제인 것 같다. 용기를 내 말을 걸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친구가 된다. 물론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거절당할 게 두려워 시도해보지도 않는 것보다 낫다.
제천역에서 환승하다. 미니카페칸에 타다. 일반적인 열차카페보다 미니카페가 훨씬 좋은데, 누워서 잘 수 있기 때문이다. 밀짚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퍼질러 잤다.
여행 이전에 나는 얼마나 아등바등 살았는가. 얼마나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았는가. 사람이 바뀔 수 있는데 필요한 건 용기 이외엔 없는 듯하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느낌이다. 처음 페달 밟기가 힘들지 한번 동력이 붙으면 쌩쌩 달린다.
열차가 조치원에 도착했다. 직원 분께 아산으로 가는 전철 편을 여쭤보자 전철은 자기도 잘 모른다고 한다. 내려가 편의점에서 간단히 저녁 끼니를 해결하다.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다 와서 그런지 여긴 정말 습하고 덥다. 역 앞에는 이전 여행지들에서 볼 수 없던 유흥가의 불빛이 번쩍인다.
천안으로 가는 열차에 탑승하다. 확실히 경부선의 승객은 타 선보다 많다. 전철 시간을 보니 내리자마자 뛰면 운 좋게 전철을 탈 수도 있다. 만약 전철을 놓치면 다음 차를 이십 분 이상 기다려야 한다.
열차 문이 열린다. 달리기 시작! 나의 캐리어는 덜컹덜컹 소리를 내며 날 쫓는다. 갈림길이 나오자 직원에게 물었다.
“배방역 가려면 어느 쪽이에요?”
“저쪽이요.”
다시 뛴다. 호흡이 가팔라진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꽤나 빠르게 뛰어온 것 같은데 전철을 놓쳤다. 플랫폼에 서서 숨을 골랐다.
맥박을 짚었다. 하나 둘 셋넷... 십 초 동안 서른세 번.
분당 약 이백 회.
아무것도 안 하고 두 시간 째 통신실에서 가만히 당직을 서고 있을 때였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어 근무 중 의무대로 실려갔다. 응급실로 들어가자마자 상의를 탈의하고 심전도 체크기를 달았다. 중간중간 군의관이 들어와 그래프를 체크하고 나갔다. 한 시간이 경과했지만 맥박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맥박은 두 시간이 지나서야 떨어졌다. 부대에 복귀하고 다음 날 의무대에 다시 찾아갔다.
군의관이 말했다.
“자네 담배 끊은 지 얼마나 됐지?”
“반년 정도 됐습니다.”
“앞으로도 피지 마. 담배가 폐보다 심장에 더 안 좋아. 그리고 술이나 카페인도 자제하고, 스트레스받지 말고.”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심각한 겁니까?”
군의관은 나의 질문에 안경을 고쳐 쓰고 나를 바라봤다.
“어떤 기준에서 심각하냐는 거지?”
“그러니까, 당장 치료를 받아야 한다거나... 그래야 되는지 말입니다.”
“안 그래도 돼. 관리만 잘하면 된다는 말이야. 자네 증상은 동성 빈맥이야. 부정맥이 의심돼서 어제 그래프를 한참 동안 봤는데 부정맥은 보이지 않았어. 대신 어제처럼 심장이 또 그렇게 뛰면 밤에라도 응급실로 가야 돼. 괜히 가만히 있다가 큰일 나는 수가 있어.”
“알겠습니다.”
“됐어. 가봐.”
일어나 거수경례를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가만히 앉아 심호흡하다. 당장 병원에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앉아서 천천히 숨을 고르자 맥박과 호흡이 조금씩 본래의 리듬으로 돌아왔고 주위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죽을 뻔했네.”
혼잣말을 내뱉었다. 빈맥이란 급할 때 뛰는 것도 겁내야 될 정도로 불편한 병이다. 만약 금방 진정되지 않았다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라도 요청했을 것이다.
이십 분의 시간 동안 나머지 숨을 골랐다.
전철을 타고 4개 역을 지나 배방역에 도착하다. 역 앞으로 나오자 이제까지의 여행지와는 다른 몇 가지가 눈에 띈다.
1. 차선 多
2. 유동차량 多
3. 고층아파트 多
신도시의 모습이다. 평당 몇 백만 원이라고 떠들어대는 아파트 광고 현수막이 보인다. 택시비가 있나 지갑을 열어 확인했지만 현금이 없다. 역사 내부 신협 ATM에서 수수료 1,000원을 내고 돈을 뽑았다. 여행이 길어지니 수수료조차 아깝다. 이대로 가다간 통장에 50만 원도 안 남을 듯하다.
역사 바로 앞은 다차선 도로이고 후문 쪽은 논밭만 펼쳐져 있어 도무지 택시를 잡을 수가 없다. 콜을 부를까 생각하던 와중 택시 한 대가 배방역으로 와 승객을 내려주었다. 잡아서 탔다.
“어디로 모실까요?”
“지중해 마을이요.”
“지중해... 잠시 만요.”
네비를 치는데 한참을 틀리신다. 답답해서 스마트폰으로 지도 어플을 켰다.
“일단 쭉 출발하시면 되겠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이 동네에서 택시 한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습니다. 이쪽에서 좌회전이요.”
돈 내고 택시 탔는데 길 가르쳐 주면서 가는 건 또 처음이었다. 그래도 잘못 가진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기사님이 말했다.
“여행하시나 봐요.”
“네. 전국을 여행하는 중입니다.”
“와. 정말 멋지네요. 저도 그게 꿈이거든요.”
“그러세요?”
“네. 제가 암투병 생활을 하고 있거든요. 암 걸리고 나니까 못 가본 데가 너무 많은 게 후회되더라고요. 죽기 전에 꼭 해 봐야죠. 전국일주.”
그 사연을 들으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여행이 누군가에겐 평생의 목표구나.
“택시 안 오면 어떻게 하려고 하셨어요?”
“콜 부르려고 했죠.”
“그게 나을 거예요. 아산은 버스 교통이 별로 좋지 않거든요.”
“딱 봐도 부자동네인데 왜 버스교통이 발전 안 된 겁니까?”
“부자동네니까요. 여기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 가는 택시비 크게 아까워하지 않아요. 그래서 택시 장사가 잘 돼요. 저도 원래 서울에서 택시 하다가 이 동네 왔거든요.”
“그러시군요.”
아산엔 뭐가 있나 싶어 기사님께 여쭈었더니 도고온천을 추천하셨다. 아산 하면 온양온천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긴 한데 정작 아산 사람들은 도고온천으로 간단다. 여독도 풀어줄 겸 내일 온천욕이나 해야겠다.
지중해 마을 입구에서 내리다. 입에서 감탄사가 나왔다. 반짝이는 조명 사이를 누비며 사진을 찍어댔다.
지중해의 산토리니에 비하면 너무 실망스럽지만 저 먼 태백에서 여기까지 오느라 하루 종일 고생한 나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하자 너무 예뻤다. 중간에 한 커플이 촌놈 하나가 마을을 헤집고 다니는 꼴을 보고 피식 웃고 지나간다.
숙소인 <지중해> 게스트하우스 이층에 올라가 보니 아무도 없다. 주인께 전화를 걸어보니 201호에 들어가란다.
신혼부부 살림집을 연상케 하는 잘 꾸며진 거실이 나를 먼저 반겼다. 8인실 침실 문을 열자 아무도 없을뿐더러 누가 놔둔 짐조차 없다. 사장님이 전화로 말씀하셨다.
“오늘 혼자 쓰시면 돼요.”
“네? 이 큰 방을요?”
“네. 남자 예약자가 한 분밖에 없거든요. 혼자 쓰시면 됩니다.”
“아니 저는 만 칠천 원 냈는데요.”
“하하. 너무 좋으시죠? 저도 되게 손해 보는 장사인데 그렇다고 쫓아낼 순 없잖아요. 가격을 올리는 것도 안 될 일이고요. 아무튼 푹 쉬세요.”
전화를 끊었다. 하루가 끝나기 전 맞이한 행운에 당황스러웠다. 방 안에는 깔끔하게 청소된 화장실이 비치되어 있다. 샤워하고 나오자 미리 틀어놓은 에어컨으로 인해 방 안이 딱 시원한 온도로 맞춰져 있었다.
하루 피로가 확 풀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