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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춘열 Mar 20. 2019

만년필 카트리지를 교체하며

훌륭한 목수는 연장 탓을 않지만, 훌륭한 글쟁이는 필기구 탓을 한다?

“책상 위 굴러다니는 모나미 볼펜 집어서 사인하는 사람과 양복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척하고 꺼내 서명하는 사람. 뭔가 큰 차이가 있지 않아?”    


처음 만년필을 구입했던 건 직장동료의 말 때문이었다. 훌륭한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글을 쓰는데 아무거나 집히는 볼펜으로 하는 것보다는 본인만의 만년필로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는 그럴싸한 말에 혹했던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 부담스럽지 않은 라미 사파리를 구입했다. 각인 서비스로 내 이름까지 단 만년필은 며칠 신나게 사용된 후, 사무실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모셔져 왔다. 


얼마 전 다시 메모와 노트를 생활해 보고자 만년필을 어둠 속에서 소환해냈다. 펜촉은 딱딱하게 굳어 사용할 수가 없었다. 한 자세로만 오래 있으면 불편해지는 건 사람이나 만년필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인터넷을 뒤져 미지근한 물로 굳은 잉크를 녹이고 새 카트리지를 끼우니 새것처럼 잘 나왔다.     


2주 정도 사용했을까? 나른한 오후 수업시간에 졸음을 쫓다가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만 것처럼 잉크가 잠깐씩 안 나오더니 아예 나오지 않았다. 뭐가 잘못된 건가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니 잉크가 다 된 것 같았다. 카트리지를 교체하니 만년필은 진한 검은색 잉크를 뿜어댔다. 마치 수업 종료 종소리와 함께 깨어났었던 것처럼.    


카트리지를 교체할 만큼 많이 사용했고, 노트 한 권을 다 써간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물론 오래 썼다기보다 단기간에 필기를 많이 해서이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시작만 요란하지 않도록 꾸준해야겠다.      


훌륭한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진 않지만, 훌륭한 글쟁이는 필기도구 탓을 하는 모양이다. 만년필 하나로 훌륭한 글쟁이가 된 것 같다. 대통령의 글쓰기로 유명한 강원국 작가의 블로그에서 본 글이다.    


필기도구를 아무것이나 쓰지 마라.
까탈을 부려라.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에 나오는 "작가의 기술에 관한 13개의 테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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