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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보이 Feb 04. 2019

[에이스 호텔] 놀러와

브랜드 에이스 호텔

[에이스 호텔 뉴욕] 뉴욕타임즈는 에이스 호텔을 가리켜 '미국에서 가장 독창적이고 신선한 호텔'이라고 했다. 에이스 호텔 뉴욕 지점을 찾았다.
[에이스 호텔 뉴욕] 로비는 에이스 호텔의 상징이다. 투숙객뿐 아니라 누구든 와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뉴욕의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이 영감을 얻으러  이 곳을 찾는다.
[에이스 호텔 뉴욕] 에이스 호텔은 불필요한 격식을 멀리한다. 언제나 쿨한 친구처럼 이야기한다. 고객에게 건내는 말에도 위트를 담는다. 에이스다운 공기가 만들어진다.
[에이스 호텔 뉴욕] 방마다 놓여져 있는 턴테이블과 기타. 뉴욕 29번가의 호텔방에서 듣는 캐서린 윌리엄스는 더 감미롭다. 기타 옆의 검은 박스는 냉장고. 반전이었다.
[에이스 호텔 뉴욕] 무심하게 놓여져 있는 소품들에도 '힙함'이 묻어난다. 뭘 좀 아는 '쿨한' 친구의 집에 방문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에이스 호텔은 여러 브랜드들과 친분이 두텁다. A.P.C, 컨버스, 아크네, 리바이스 등과 협업하여 상품을 출시했다. 에이스 호텔과 온라인샵에서 콜라보 상품을 구입할 수 있다.
[에이스 호텔 뉴욕] 1층에 자리한 스텀프타운. 에이스 호텔이 포틀랜드에서 발굴한 커피 로스터리였다. 스텀프타운은 에이스라는 좋은 친구를 둔 덕에 전국구 스타로 발돋음 했다.
에이스 호텔은 지역에 잘 녹아 든다. '미국의 자전거 수도' 포틀랜드에서는 지역의 장인들과 협업하여 자전거를 제작했다. 에이스 호텔 포틀랜드 지점의 게스트들에게 제공한다.
에이스 호텔은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공간을 내어준다. 이들은 호텔 안을 꾸미고, 공연과 전시를 열기도 한다.
에이스 호텔의 첫 번째 아시아 지점이 일본 교토에 생긴다. 일본 건축계의 거장 쿠마 켄고가 설계를 맡았다. 2019년 하반기 오픈 예정.


“놀러 와”

청년 사업가 김정주는 말했다. 탐나는 인재를 볼 때마다 그랬다. 주로 그의 서울대, 카이스트 후배들이 이 말을 들었다. 거창한 비전을 제시하지 않았다. 인센티브로 유인한 것도 아니었다. ‘놀러 와’ 한마디를 툭 던졌을 뿐이다. 듣는 이 입장에서도 부담 없는 한마디였다. 치킨 사준다길래, 맥주 마시러 오라기에 ‘놀러갔다’. 역삼역 4번출구 앞 성지하이츠 Ⅱ 오피스텔 2009호였다. 그곳에는 최신 컴퓨터가 있었다. 맛있는 간식이 풍성하게 차려져 있었다. ‘당대의 천재’들이 초대를 받았다. 신나게 놀았다. 놀다보니 어느덧 직원이 되어 있었다. 게임을 만들고 있었다. 세계최초의 온라인 그래픽 게임 <바람의 나라>가 그렇게 나왔다. 캐주얼 게임의 시초 <퀴즈퀴즈>, 국민게임 <카트라이더>가 탄생했다. 넥슨은 김정주의 ‘놀러 와’라는 말과 함께 성장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앤디 워홀은 혼자 일하지 않았다. ‘팩토리’에서 일했다. 앤디가 모자공장을 개조해서 만든 작업 스튜디오였다. 당대의 핫플레이스였다. 온갖 부류의 아티스트가 모여들었다. 시인, 화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 있었다. 마약중독자와 성전환자도 섞여 있었다. 각자의 ‘다양함’은 ‘새로움'을 낳았다. 실크스크린 작품을 찍고, ‘잠’ ‘엠파이어’ 같은 독립영화를 제작했다. ‘공장’은 쉴새 없이 돌아갔다. '공장장' 앤디워홀을 시대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에디 세즈윅은 스타로 떠올랐다. 팩토리는 만남의 광장이었다. 놀이터였다. 현대미술의 성지로 남았다.

엔디 워홀의 팩토리. 매일 밤 파티가 열리는 힙한 공장이었다.


에이스 호텔도 놀이터였다. 놀 줄 아는 이가 설립했다. 놀 줄 아는 친구가 모였다. 새로움에 관심이 많고, 감각적인 이들이었다. 에이스 호텔은 판을 깔았다. 나랑 놀고 싶은 사람은 여기 여기 붙어라. 딱 ‘에이스스러운’ 친구들이 집결했다. ‘에이스스러운’ 또 다른 친구들을 데리고 왔다. 유유상종이었다. 에이스 호텔은 멋스러운 건물 이상이었다. 아지트였다. 구심점이었다. 에이스의 친구가 늘어갔다. 호텔을 넘었다. 문화가 되었다.


노는 형

알렉스 콜더우드는 노는 형이었다. 매일 밤 시애틀의 물 좋은 클럽을 휘젓고 다녔다. 그곳에서 다양한 ‘선수’들을 만났다. 클럽의 사장부터 DJ, 뮤지션까지 친구로 두었다. 훗날 사업 파트너가 될 웨이드 웨이글도 클럽에서 사귀었다. 노는 것도 열심히 하고 볼 일이었다. 황금인맥이 쌓였다.

알렉스 콜더우드는 잘 노는 형이었다.

알렉스에게는 일도 놀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남성의류 매장 ‘인터내셔너러 뉴스’의 직원이 되었다. 적성에 맞았다. 놀면서 일하는데 월급을 받았다.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것보다 백배쯤 재미있었다. 현장이야말로 ‘진짜 학교’였다. 노는 형은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트렌드의 최전선에 거했다. 유행에 밝았다. 취향은 굳건했다. 멋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나누는 기준은 애매하지 않았다.

알렉스의 친구들도 죄다 힙스터들이었다. 이벤트와 파티는 일상이었다. 그냥 흘려 보내는 시간이 아니었다. 서로 정보를 공유했다. 영감을 주고 받았다. 나중에 뭐라도 같이 해보자는 결의를 다졌다. 무척 생산적인 시간이었다.


알렉스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았다. 그 맨 꼭대기에 ‘공간 사업’이 있었다. 맘 맞는 친구들이 편안하게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가 들르고 싶은 곳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일거야. 흔쾌히 돈을 지불 할거야. 어렴풋하게 구상을 하던 즈음이었다. 거리의 이발소가 눈에 들어왔다.


루디스 바버샵

주변에 갈 만한 이발소가 없었다. 커트는 예술의 영역이었다. 예술가가 보이지 않았다. 서비스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흡족한 마음으로 이발소를 나선 적이 없었다. ‘쥐기는 이발소’를 선보이고 싶었다. 쳐진 기분으로 들르더라도 유쾌한 마음으로 나가는 곳. 루디스 바버샵의 탄생이다.

'아메리칸 클래식'으로 공간을 채웠다. 성조기를 내걸고 전후 시대에 유행했던 가구를 배치했다. 그 안에서 온 몸에 문신을 두른 '핫가이'들이 손님을 맞았다. 모호크, 반삭발 같은 양아치(?) 스타일 전문이었다. 타투를 새겨주고, 로컬 밴드의 콘서트 티켓을 팔았다. 예약을 받는 직원이 담배를 피우며 타로점을 봐주는 곳이었다. 어느 신문이 소개한 그대로였다. ‘미국에서 가장 섹시한 클래식 바버샵’.


성공에 대한 확신은 없었다. 한 달을 버틸 수 있을지 우려했다. 기우였다. 손님으로 미어 터졌다. 시애틀에서 뭘 좀 안다 하는 이들이 갈만한 이발소는 오직 루디스 바버샵뿐이었다. 1시간 30분을 기다려야 입장할 수 있었다. 날로 번창했다.

루디스 바버샵의 첫번째 매장. 26년차의 관록을 자랑한다. 현재 미국 전역에 30여개의 지점이 있다. 여전히 클래식하면서도 트랜디하다.

루디스 바버샵의 성공은 강력한 메시지였다. 알렉스와 친구들이 대책 없는 ‘별종’은 아니라는 메시지. 그들이 원하는 서비스가 시장에 분명한 수요로 존재한다는 메시지. 자신감을 장착했다. 그 동안 하고 싶었던 일들을 모조리 실행에 옮겼다. '콜더우드앤코'라는 프로모션 에이전시를 차렸다. 마케팅 에이전시 ‘네버스톱’, 음반 기획사 ‘스위트 머더 리코딩스’, 디자인 회사 ‘아트앤레볼루션 오거니제이션’도 열었다. 알렉스를 찾는 곳이 늘어갔다. 몸이 열 개여도 부족한 나날이었다.


호텔

“우리 여기서 호텔이나 해볼까?”

루디스 바버샵의 새 부지를 물색하던 중이었다. 시애틀 시내의 구세군 건물을 찾았다. 알렉스는 생뚱맞게 호텔 이야기를 꺼냈다. 즉흥적으로 던진 말은 아니었다. 호텔은 알렉스의 숙원 사업이었다. 먹고 놀고 마시고 쉬는 모든 라이프스타일이 응집된 공간이었다. 알렉스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장소였다. 호텔에서 실력 발휘를 해보고 싶었다. 매물로 나온 구세군 건물을 보자 몸이 근질거렸다.


알렉스와 친구들 중에 호텔업에 몸담았던 이가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했다. 바버샵과 호텔의 본질은 같은 거다. 둘 다 ‘사람들이 어울리고 싶은 곳’을 만들면 되는 거다. 알렉스 생각에 호텔은 조금 더 스케일이 큰 바버샵이었다. 1999년에 에이스 호텔을 세웠다. 무식해서 용감했다.


데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한대 쳐 맞기 전까지는"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의 명언이다. 알렉스와 친구들도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호텔을 만만하게 봤다. 제대로 쳐 맞았다. 실수를 연발했다. 구세군 건물을 인수하면서 세입자들까지 떠안은 건 그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변기를 창문 밖으로 던지는 상식 이하의 인간들과 싸웠다. 악몽같은 시간이었다.

자금도 금방 바닥났다. 대출, 투자금과 개인 돈을 긁어 모은 돈이 겨우 200만 달러였다. 구세군 건물을 헐고 그럴듯한 호텔을 짓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호텔업에 대해 무지했다. 돈도 없었다. 가진 것이 없다는 건 분명 단점이었다. 리스크였다. 망할 요인이었다. 그런데 희한했다. 에이스호텔에게는 ‘제약’이 ‘기회’로 작용했다.


호텔업을 잘 모르는 아마추어였다. 신선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왜 모든 방이 다 똑같아야 되지?”

“왜 호텔에 배치된 어메니티는 다 비슷하지?”

“왜 숙박비가 비싸야 되지?”

“왜 로비는 저렇게 엄숙하지?”

“왜 직원들은 저렇게 뻣뻣하게 응대하지?”


아무것도 모르니 '제멋대로' 생각할 수 있었다.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웠다. 에이스 호텔만의 답을 찾았다. 업계의 관행을 무너뜨렸다.


새 호텔을 지을 돈이 없었다. 구세군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최선이 아닌 차선책이었다. 궁여지책이었다. 색다른 호텔이 나왔다. 역사가 스민 옛 건물과 트렌디한 인테리어가 묘하게 충돌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야 유행이 된 방식이었다. 1990년대 중반에 시도했다. 시대를 앞섰다.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희한한 호텔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28개의 객실은 연일 매진이었다. 투자 대비 수익률은 쏠쏠했다.

첫 번째 에이스호텔. 낡은 구세군 건물이 당대의 가장 핫한 호텔로 변신했다. 기적이었다.

화려한 데뷔였다. 시애틀에서 가장 뜨거운 스팟으로 떠올랐다. 열기는 시애틀 밖으로도 퍼져나갔다. 포틀랜드, 뉴욕, LA 같은 도시에도 에이스 호텔을 세웠다. 런던, 파나마에도 진출했다. 2019년, 에이스 호텔은 전세계 9개의 지점을 운영 중이다. 속도를 조절해가며 성장하는 중이다. 연간 천백만 달러쯤 되는 수익을 올린다.


에이스 호텔의 파급력은 숫자를 넘는다. 에이스호텔이 들어서는 곳마다 동네가 변한다. 지역 경제가 살아난다. 전세계의 크리에이터들의 성지순례지가 된다. 변화의 주역이다. 미친 존재감이다.


지금의 에이스 호텔을 만든 요인은 하나로 모인다. 잘 놀았다. 지역과 함께, 힙하게 놀았다. 에이스 호텔은 잘 놀아서 성공했다. '노는 형' 알렉스 콜더우드의 오랜 바램이 통했다.



지역과 놀았다

보통의 호텔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호텔을 세운다. 사람들이 들르고 나는 곳이라야 모객이 쉽다고 보기 때문이다. 에이스 호텔은 조금 독특하다. 스스로의 '취향'이 기준이 된다. 둘러보고 싶은 숍, 카페, 레스토랑이 많은 동네를 찾는다.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에 호텔을 세운다. 즉, 스스로 놀고 싶은 곳에 들어간다. 데이터보다는 직관을 믿는다. 다른 호텔들은 고려조차 않을, 상권이 죽은 지역에도 들어간다. 들어가서 우리가 바꾸면 되니까. 놀다 보면 상권이 살아 날 거니까. 에이스식 믿음이다. 믿음은 열매를 맺는다. 에이스 호텔이 들어서는 일대는 '무조건' 뜬다.


여타 호텔체인에게 ‘호텔’은 ‘건물’이다. 새로운 곳에 지점을 낼 때에는 건물과 서비스 그대로 이식된다. 시카고의 힐튼이나 도쿄의 힐튼이 다 거기서 거기인 이유이다. 에이스 호텔은 다르다. 지역마다 다른 답을 내놓는다. 각 지역의 ‘이야기’들로 호텔을 채운다. 다른 곳에서는 만날 수 없는, 그 지역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컨텐츠가 만들어진다.


동네 친구를 사귀는 데서 출발한다. 호텔 디자인에 참여할 아티스트, 오프닝 파티를 맡길 DJ와 교류한다. 흥미로운 바텐더를 봐둔다. 각자에게 꼭 맡는 역할을 맡긴다. 이들이 에이스식 현지화의 동력이 된다.

지역 내 장인들과도 긴밀하게 협업한다. ‘자전거 수도’ 포틀랜드에서는 지역 장인이 만든 자전거를 게스트용으로 제공한다. 지역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로비와 방에 전시한다.


지역의 ‘자원’을 호텔 안들이는 것도 에이스 호텔의 특징이다. 포틀랜드에서는 '스텀프타운'이라는 걸출한 커피 로스터리를, 뉴욕에서는 패션 편집매장 '오프닝 세리머니'를 발굴했다. 에이스 호텔에 입점시켰다. 지역 내에서 한 가닥 하는 클럽, 갤러리, 카페, 레스토랑들 이런 식으로 에이스호텔의 품 안 안긴다. 그 결과, 9개의 에이스 호텔은 서로 다른 에이스 호텔로 존재한다. 에이스 호텔의 자랑거리다.


‘빈자의 미학’으로 유명한 건축가 승효상은 땅에도 지문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터 무늬’다. 바람직한 건축은 이 ‘터 무늬’와 결을 같이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땅에 새겨진 기억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나라 대한민국에는 ‘터 무늬’를 무시하는 ‘터무니없는’ 공간이 태반이다. 옛 동대문 운동장의 터 위에 '폭력적으로' 들어선 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처럼.


에이스 호텔은 바로 이 ‘터 무늬’를 중시한다. 한 지역의 호텔을 다른 곳에 복제하지 않는다. 뉴욕과 포틀랜드의 에이스 호텔을 두 지역의 차이만큼이나 다르게 만든다. 건물을 신축하기보다 오래된 건물을 고쳐 짓는다. 지역 주민들의 신뢰가 두터운 상점들을 발굴하여 입점시킨다. 로컬 커뮤니티에서 끌어온 고유한 이야기를 채운다. 에이스 호텔은 홀로 튀지 않는다. 지역과 논다. 지역을 살린다. 꾸준히 사랑 받는다.


힙하게 놀았다

“굉장히 쿨한 친구의 집에 놀러 가는 거 같아”


에이스 호텔을 수시로 드나드는 지인이 말했다. 그 말이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호텔에 들어서면 처음으로 마주하는건 저 유명한 에이스 호텔의 로비이다. 이 호텔의 쿨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공간이다. 넓은 테이블이 있고,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 1층의 스텀프타운에서 커피를 가져와서 마실 수도 있다. 투숙객이 아니더라도 머무를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노트북을 펼쳐두고 몇 시간을 있어도 눈치를 주는 직원이 없다. 숙박객, 외부 방문객, 지역 주민들이 로비에서 만난다. 기존의 '근엄한' 호텔 로비에서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캐주얼'함이 만들어진다. 없던 창조성도 샘솟을 것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다. 에이스 호텔의 로비가 수많은 크리에이터들에게 인기를 얻는 비결이다. 스타트업 관계자들, 영화계 사람들, 베스트셀러 작가 등이 최고로 애정하는 작업실 겸 만남의 장소다. 이제는 상당수의 호텔들이 에이스 호텔을 따라 로비를 개방한다.


에이스 호텔에 흐르는 공기 또한 매우 캐주얼하다. 직원들은 과한 친절을 베풀지 않는다. 편안한 유니폼을 입고 마치 동네친구 대하듯이 편안하게 고객을 응대한다. 서비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방문객들과 하이파이브를 한다. 노는 것처럼 일한다.


호텔 이곳 저곳에 위트가 배어 있다. ‘방안에서는 금연’이라고 말하는 대신 ‘담배를 펴도 되는데, 낯선 사람한테 250달러 줄 생각은 하고” 라고 하는 식이다. 엘리베이터 옆에는 “계단으로 내려갔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라는 표지판이 붙어있다. 이런 건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몸에 배어 있는 센스다.


에이스 호텔의 '감도 높은' 취향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방에서는 에이스가 엄선한 LP를 감상할 수 있다. 욕실에는 '아크네'의 목욕가운, '루디스 바버샵'의 샴푸가 놓여져 있다. 1층 로비 옆에서는 에이스 호텔과 협업한 브랜드 '핸더스킴'의 신발,  '윙즈 앤 혼즈'의 티셔츠가 판매된다. 모두 에이스 호텔의 높은 기준을 통과한 아이템들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준비하는 법이 없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사실 에이스 호텔의 시설 자체는 특별한 것이 없다. 특급 호텔다운 고급스러움과 편안함을 기대했다가는 실망 하게 될 공산이 크다. 에이스 호텔이 추구하는 '클래식함' 조차도 좋게 말하면 레트로, 그 반대로 말하면 낡음이다. 충분히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에이스 호텔의 로비를 두고도 투숙객을 고려하지 않는, 정신 없는 장소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지 않는 것도 종종 불평거리가 된다.

 

그러나 에이스 호텔은 가던 길을 고수한다. 결점을 보완하기 보다는 스스로의 강점을 강화하는 쪽을 택한다. 놀고 싶은 대로 논다. 늘 로비를 오픈한다. 직원들은 격의 없는 서비스와 위트로 무장한다. 빈티지스러운 취향으로 호텔을 발라버린다. 이 모든 것들이 모여 에이스만의 쿨하고 힙한 공기를 만든다. 나머지 결점을 덮고도 남는다. 에이스호텔을 찾는 이마다 그 공기에 취한다. 감동한다. 에이스 호텔의 팬이 되어 나간다.


딱 봐도 가장 고급스러운 호텔은 아니다. 그러나 뭘 좀 안다 하는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서의 하룻밤을 고대한다. 힙한 기운을 느끼고자 한다.

에이스

노는 형이 떠났다. 알렉스 콜더우드가 런던 쇼어디치 에이스 호텔의 한 객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2013년 11월 이었다. 이제 겨우 47세였다. 과도한 약물복용이 원인이었다. 일과 노는 것의 경계가 없던 형이었다. 정작 제대로 쉬는 법을 몰랐다. 허무하게 떠났다.


수장을 잃은 에이스 호텔은 깊은 슬픔에 잠겼다. 알렉스는 단순한 창업자가 아니었다. 에이스 호텔이라는 창의적인 발명품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기존 호텔업계에 충격파를 주었다. 멋진 호텔의 기준을 바꾸었다. 무엇보다, 에이스 호텔은 알렉스가 만든 놀이터였다. 알렉스와 친구들의 놀거리가 집결된 장소였다. 알렉스는 놀이터에서 함께 뛰어 놀 친구들을 불러들였다. 에이스스러운 방식으로 놀았다. 에이스 호텔을 세상에서 가장 쿨한 놀이터로 빚었다.    


알렉스가 떠난 후에도 에이스 호텔은 전진한다. 그의 친구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알렉스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한다. 놀고 싶은 장소를 찾아서 새로운 에이스 호텔을 짓는다. 에이스스러운 친구들을 초대한다. 신나게 논다. 지역을 에이스로 물들인다. 이 모든 과정은 여전히 자연스럽다. 알렉스가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카드 게임에서 ‘에이스’는 가장 높은 숫자인 동시에 가장 낮은 숫자도 될 수 있는 카드다. 모든 이들의 놀이터가 되고자 했던 에이스 호텔에 꼭 맞는 이름이었다. 알렉스가 이름을 지었다. 어릴 적 그의 별명도 ‘에이스’ 였다. 많은 친구들이 그를 따랐다. 그를 사랑했다. 


“알렉스 콜더우드, 우리의 선생님, 멘토, 구루,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의 소중한 친구. 우리는 그가 그리울 겁니다.


알렉스 콜더우드가 떠난 날, 에이스호텔의 홈페이지에는 이런 문구가 띄워졌다. 알렉스도 '놀러와'의 삶을 살았다. 무수히 많은 친구들이 그의 초대를 받았다. ‘노는 형’ 알렉스와 신나게 놀았다. 알렉스는 에이스호텔을 남기고 떠났다. 끝까지 에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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