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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 포스트휴먼의 환상성 (4)

김초엽,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부제  : 알랭 바디우의 이론을 바탕으로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해석하기



4. '올리브' ; 유해한 세계로의 탈주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간에 오고가는 월경들 가운데 조금 더 보편적인 방향으로의 월경(越境)을 따지자면, 그것은 디스토피아에서 유토피아로 향하는 월경일 것이다. 사람들은 대다수 현재 당면한 상황을 문제로 규정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리브가 시도한 월경은 역방향이었다. 그는 애초에 디스토피아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며, ‘마을’의 근원을 알기 위해 ‘시초지’로 향했다. 그의 진리에의 추구가 월경을 추동했으며, 결과적으로 그가 얻고자 했던 마을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이 얼마나 많은 행복의 가능성들을 놓치고 살았는지 역시 깨닫게 되었다. 그는 지구의 ‘이타사’라는 도시에서 ‘비개조인’으로 분류되는 ‘델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는 “난동을 부리는 손님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총을 꺼내 협박”(31)할 정도로 성격이 거칠면서도 올리브를 이해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델피의 도움으로 릴리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 올리브는 마을로 돌아갔지만, 10년 후 다시금 시초지로 돌아왔다. 데이지의 말로 추측하건대 마을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가령 순례 의식을 만드는 일을 끝낸 후에 델피의 곁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 월경은 디스토피아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디스토피아로 간 것이었지만, 두 번째 월경은 알고도 간 것이기에 의미가 크다.


올리브가 최초로 릴리의 명령을 거스르고 시초지로 향한 원동력이 ‘진리에의 추구’였다면, 진실을 알고도 다시 “가장 비참한 시초지”(53)로 돌아간 원동력은 ‘사랑’이었다. 진리와 사랑, 그 둘은 다른 성격의 명분으로 보이지만, 알랭 바디우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그는 사랑이, 예컨대 그의 고유한 철학적 용어로 그가 “진리의 절차”라고 일걷는 무엇, 다시 말해서 어떤 형태의 진리가 구축되는 하나의 경험이라고 주장한다. 아주 단순히 말해서 이 진리는 ‘둘에 관한 진리’다. 있는 그대로, 차이의 진리라는 것이다.(알랭 바디우, 조재룡 옮김, 『사랑예찬』, 길, 2010. 51-52쪽) 따라서 사랑을 추구하는 행위는 곧 진리를 추구하는 것과 같다. 그는 진리가 주어지지 않은 세계에서 살았고, 그 자신의 내부에서 주어진 틀을 뛰어넘을 힘을 발견했으며, 이를 실행에 옮겼다. 이 지점에서 바로 올리브가 가진 ‘주체성’이 드러나는데, ‘자신의 내부에 자리한 뛰어넘음의 힘’은 알랭 바디우가 말했던 ‘행복의 주체’의 세 가지 근본적인 특성 중 하나다. (“주체의 행복은 그 자신의 내부에서 자신에게 있는지 미처 몰랐던 무언가를 실행할 능력을 발견하는 데 있다. … 말하자면 뛰어넘음의 힘이 그 자체에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명백한 경계 너머로 가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완전한 행복은 유한성에 대한 승리이다.”(알랭 바디우, 박성훈 옮김, 『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2016. 91쪽))


나머지 두 가지 조건을 살펴보더라도, 올리브가 ‘행복의 주체’의 조건에 부합함은 명백하다. 첫째는 다음과 같다. “새로운 주체의 자유는 세계 내에 있으나 예외로 있는 무언가를 창조하는 데 있다. … 진정한 자유란 언제나 세계 내에서 예외적인 귀결로서의 실재에 의해 규정된 무언가를 실행하는 방식이다.” 올리브가 실행한 것은 마을 내에서 예외적인 것으로 규정된 ‘사랑’과 ‘진리 추구’ 였으며, 그는 마을의 규칙에 순종하기보다 규율을 뛰어넘기를 택했다. 둘째 조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주체는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지 않는다. 내제적 예외로서 해방의 과정은 개방적이며 무한하다 … 연인들의 고유한 작업, 즉 사랑은 그들을 구별하며 분리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정체성을 제거한다는 뜻이다.” 그는 ‘릴리의 자손’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에 갇히지 않았다. 바꿔 말해 릴리가 부여한 ‘무해한 포스트휴먼’이라는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따라서 알랭 바디우의 정의를 따르자면 그는 단순히 진리와 사랑을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행복까지 쟁취해낸 인물이다. 무해함이 대상화로부터 성취되는 것이라면, 올리브는 무해한 세계로부터 주체적으로 빠져나와 행복의 가능성을 획득했다.


주체라는 것이 유한한 종속 관계로부터 빠져나와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편입하는 점을 고려하면, 귀환한 순례자의 입장에서도, 마을에 남기로 선택한 것 역시 일종의 주체적 선택으로 볼 여지가 있으며, 순례에서 다녀온 것만으로 이미 그들 안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내재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만약 ‘순례’라는 선택의 기회 없이 그저 ‘무해한 포스트휴먼’으로 남았다면 그들은 완전한 행복을 누릴 가능성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올리브가 보여준 주체의 특징을 통해 알 수 있듯, 대상으로서 무해할 수는 있어도, 주체로서 행복을 추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무해함이 행복과 완전히 대립되는 지점이 있다면 그것은 행복이 모든 사람이 저마다 만족을 얻는 좋은 사회를 가리키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어려운 과제를 수행할 주체성이라는 점이다.(알랭 바디우, 박성훈 옮김, 『행복의 형이상학』, 민음사, 2016.) 무해함은 안주함으로써 만족하기 위한 가치에 가깝다면, 행복은 예측되지 않는 모험을 수행하는 주체로서 획득 가능한 것이다. 무해함은 어려운 과제 자체를 회피함으로써 획득된다. 이로써 무해와 행복 간의 대립항이 성립함을 확인할 수 있다.


‘무해함’이라는 이상이 행복과 대립할 수밖에 없음은 주체가 객체화되는 실제 현상으로도 확인된다. 무해함을 욕구하는 것은 대상화된 세계를 창조하는 일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자기 자신마저 객체화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작품 내에서는 그러한 문제점이 직접적으로 지적되지는 않지만, 현실 세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이 무해하기를 바라는 것을 넘어 자기 자신이 무해한 존재가 되길 원하고 있다는 점(백승주, 「무해함의 발명」, 『릿터』, 38권, 민음사, 2022, 12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무해한 유토피아의 창조주는 창조주에 걸맞는 모습을 자신에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릴리가 유토피아의 설립자에 걸맞도록 신화화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앞서 지적했던 바와 같이, 무해한 ‘주체’란 존재하지 않으며 ‘무해’나 ‘순수’ 자체는 애초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박한선, 「순수로의 도피」, 『릿터』, 38권, 민음사, 2022, 19쪽) 무해한 ‘행위’란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주체는 반드시 자신이 만들어낸 무해한 이상과 자신의 유해한 생각이나 행동 간의 간극을 맞닥뜨리게 되고, 일시적으로나마 자신을 유토피아로부터 추방시킨다. 이는 무해한 유토피아가 만들어내는 유해한 스트레스다. 이는 알랭 바디우가 정의하는 행복 관념과도 어긋나는 결과이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행복한 감정’과도 명백히 반대되는 현상이다.


※이 글은 황호덕 선생님의 성균관대학교 2022학년도 2학기 국어국문학과 수업 <문학이론의 이해> 중간과제 소논문으로 제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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