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딸이 등교하기 위해 운동화를 신고 있었어요. 끈이 꽉 묶인 운동화 안에 발을 욱여넣느라 몸을 비틀며 애쓰고 있을 때 그동안 참았던 말이 툭 튀어나온 겁니다. 예상치 못한 딸의 반응에 큰 웃음이 터졌죠. 딸은 씩 웃으며 ‘다녀올게.’ 하며 집을 나섰어요. '그렇지. 내 이해가 왜 필요하겠니. 오늘은 네가 내 스승인가 보다.' 혼잣말을 했어요.
딸을 배웅하고 돌아 서는데 뒤통수라도 한 대 맞은 듯 얼얼했어요. 이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풍선처럼 둥둥 떠다니더라고요.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이해는 무엇일까? 자문하고 한나절을 기다려 얻은 대답은 이랬어요. 나의 이해는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이 오로지 내 중심적이었다는 것을요. 이해할 수 없다며 속이 시끄러운 이유 중 하나는 내 기준에 상대를 끼워 맞추려고 했던 나의 억지 때문이었어요.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들고 이게 왜 안 맞냐고 투정 부리는 아이 같았다고나 할까요. '이해가 안 되네, 이해가 안 돼.' 의미 없는 주문을외우듯 수도 없이 했던 말입니다. 대체 언제쯤 어른다워지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날 아침 생각이 진지해졌어요. 이참에 짚고 넘어가 보자 해서 이해하다의 사전적 의미를 검색해 봤네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다.'라고 적혀 있더라고요. 음식을 꼭꼭 씹어 천천히 먹듯 읽고 또 읽었어요. 그리고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혀를 찼지요. 남의 사정을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는 마음자세가 내겐 없었어요. 아이쿠야 놀랐어요. 내가 나를 잘 못 알아도 한참을 잘 못 알고 있었던 거예요. 스스로에게 속을 때가 많아요. 이렇게 살다가는 고약한 노인네가 되겠다 싶더라고요.
이해하고 싶을 땐 예의 바르게 질문하면 어떨까 해요. 예의 바른 질문이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비밀번호가 돼줄지도 몰라요. 열린 마음이 주는 답을 듣다 보면 공감되고 이해도 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의 마음사이에 길이 있었으면 해요. 나의 관점만으로는 다른 사람이 보일리가 없거든요. 마치 도수 맞지 않는 안경 끼고 세상을 보는 것처럼 뿌옇기만 할 거예요. 모든 사람은 그야말로 '다른' 사람이에요. 사람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으로 질문하고, 몸과 마음을 기울여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거예요. 서로의 마음을 오가며 이해의 폭이 넓어질거라 생각해요.
생각해 보면 모든 관계가 나의 이해를 필요로 하는 건 아니잖아요. 나 혼자 다글다글 속을 끓이며 살 뿐이지요. 누군가를 이해하는 것이 결국엔 날 위한 거라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널 위해 널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날 위해 널 이해하는 거였어요. 내 마음을 위해서 말이에요. ‘나는 이렇게 살고, 너는 그렇게 살고.’로 인정하는 마음 가져보려고요. 개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의미로 말입니다. 긍정의 시작은 인정부터라고 생각해요.
글을 읽고 어떤 의미인지 아는 것도 좋지만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요. 잠들어 있던 글자에 생명을 불어넣어 내 삶에 존재케 하는 것 말이에요. 그냥 아는 것보다 그렇게 사는 사람으로 크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이다'에서 '너그럽다'와 '받아들이다'에 '잘'의 힘을 실어 볼까 해요. 날 위해 그래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