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김밥은 다 이런 줄 알았다. 알록달록 무지개 색. 입이 터질 듯 크게 한입으로 들어가는 김밥은 그저 김밥집 사장님이나 만드는 것인 줄 알았다. 나의 국민학교 시절 소풍 도시락에는 당근, 시금치가, 단무지가 들어간 김밥을 볼 수 없었다. 그런 김밥은 그저 김밥천국에만 존재할뿐.
요리에 문외한 우리 집 정여사는 그녀만의 독특한 김밥을 만들었다. 그녀의 요리세계는 정말 창의적이다. 어느 날 김치찌개에는 노란 고무줄이 씹히고 김치인 줄 알고 씹은 그것은 비닐봉지였다. 남은 된장이 김치찌개로 변신하고 라면을 끓이면 한강이 된다. 삼계탕이라고 내어놓는 국물에 아빠는 닭이 장화 신고 건너간 물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녀의 손은 요리 파괴자가 분명하다. 그런 엄마 손에 무지개 김밥이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런 그녀는 나의 소풍 도시락에 그녀만의 독특한 김밥을 만들어주었다. 속 재료는 오직 2가지뿐. 소고기 다짐육과 김치였다. 일 년에 한 번 혹은 많아봐야 두 번인 소풍날. 어렸던 나는 도시락통을 열고 싶지 않았다.
단출하기 짝이 없는 김밥 재료 두 가지로 그녀는 대단한 김밥인양 이야기했다. 한입에 쏙쏙 들어가고 엄마가 일부러 정육점 가서 소고기 간 걸로 사 온 거라고. 그녀의 김밥은 이렇게 완성된다.
다짐육 소고기를 참기름과 간장에 볶고 밥과 비벼준다. 야채 따위 없으니 그 자리를 대체할 김치가 국물을 빼고 기다린다. 그리고 김밥김에 섞어진 깨가 쏟아진 소고기 다짐육 볶음밥을 깔고 김치를 올린다. 그리고 말면 끝나는 초간단 소고기 다짐육 김밥. 도시락통에는 소심하게 생긴 김밥들이 깨소금을 덮어쓰고는 가득 있다. 평소 요리 솜씨 없고 손이 작은 정여사라 도시락 통 김밥도 아주 미니멀하다. 덕분에 내 몸도 미니멀하고 이번생은 망했다 싶은 미니멀한 신장을 자랑한다. 가끔 엄마의 요리솜씨가 엄청 좋았더라면 내가 이거보다는 더 크지 않았겠나 싶은 마음. 엄마의 밥상은 내 밥맛을 떨어뜨렸고 입도 짧은 나는 더욱 음식을 꺼리게 되었다. 아마도 결혼 전에는 살 안 찌는 체질이라 생각했고 아마 내 체질은 영원할 줄 알았다. 물론 그건 착각이었지만 말이다.
항상 밥상에 노관심인 엄마에게 나는 불만이 많았다. 일 년에 기껏 한두 번 가는 소풍 도시락 김밥은 소풍 때마다 부끄러웠다. 자꾸 열기 싫어하는 내 김밥에 아이들은 늘 궁금해했다. 너도 나도 우리 엄마가 싸준 김밥 자랑하기에 급급한데 나는 늘 반쯤 뚜껑을 열고 반은 가리고 먹었고 가끔은 그것도 남겨왔다. 친구들은 와 너희 엄마 김밥 신기하다고 했지만 사실 나는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예의상 너희 엄마 김밥 맛있다 소리라도 하는 친구는 그저 가식 덩어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엄마의 요리솜씨는 나를 더 움츠려 들게 만들었다. 소풍날 나도 멋진 김밥 도시락을 열어 보이고 싶었다.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한 도시락을 열어보고 싶었다. 급식 1세대로 약 1년 정도만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 내 삶이 어쩌면 정말 다행이었을지도 모른다. 초창기 학교 급식은 최악 중에 최악이었지만 정여사 도시락과 사실 별반 차이 없는 급식이었기에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
엄마에게 왜 밥상이 이모양이냐고 제발 좀 맛있는 거 해달라고 하면 엄마는 늘 말했다.
"네가 배가 안 고프구나."" 네 빼고 나는 뭐 혼자 맛있는 거 먹은 줄 아느냐."
내가 원하던 건 그런 대사가 아니었다. 그저 같이 하나라도 맛있는 반찬을 먹어보자는 것인데 늘 그런 반응이다. 평일은 그래 그렇다 치고 소풍날에는 조금 더 신경 써 줄 수 있는 것 아니던가. 제발 다른 도시락을 먹어보고 싶다 나도 라고 하면 엄마의 김치 소고기 김밥 찬양과 잔소리 폭격만 있을 뿐.
내 아들의 첫 소풍이다. 며칠 전부터 예쁜 도시락 만들기 연구에 매진했다. 메추리알을 사서 귀여운 병아리를 만들고 깨알 같은 검은 눈을 위해 검은깨와 싸우겠다는 비장함으로 냉장고를 가득 채웠다. 도시락통에 한입에 쏙 들어가지만 오색 찬란한 김밥을 만들기 위해 각종 재료들을 열심히 준비했다. 얼마나 재료 손질이 걸릴지 몰라 결국 첫 도시락을 싸기 위해 밤을 새웠다. 우리 아들은 나처럼 부끄러운 도시락을 열지 않기를 바라면서. 당당하게 우리 엄마가 싸준 도시락 예쁘지? 어깨에 힘 가득 들어갈 수 있게 나의 첫 도시락에 열과 성을 다했다. 내 육아의 모토는 하나다. 우리 엄마 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
도시락을 싸려 하니 그때 엄마가 해준 소고기 김치 김밥이 생각난다. 이제는 평생 가도 먹어 볼일 없을 것 같은 그 김밥이 아주 가끔은 먹고 싶다. 아주 가끔 내가 직접 엄마가 만든 그 소고기 김밥을 싼다. 그리고 아들에게 이야기한다. 외할머니는 이렇게 늘 김밥을 싸주셨어라고. 그래서 엄마는 많이 속상했다고.
하나 맛본 아들이 말하길
" 엄마 생각보다 괜찮은데? "
"아..."
매년 소풍날 열과 성을 다해 김밥을 말았다. 하지만 아들은 한해 지난 후 친구 엄마가 보낸 유부초밥에 반해 앞으로는 김밥은 필요 없으니 유부초밥만 싸달라고 한다. 덕분에 편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성의 없는 엄마가 될까 싶어 괜히 유부초밥에 눈이라도 달아본다. 나중에 아들이 내 나이가 되었을 때 우리 엄마는 도시락에 진심이었다는 걸로 기억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