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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곡동이박사 Mar 15. 2020

돈을 공부한다고 돈을 잘 버나?

금융학 박사를 꿈꾸는 여러분을 위한 진로 케이스 스터디

많은 사람들이 막연이 어려워하는 금융 혹은 경제 주제를 쉽게 쉽게 다뤄 보고자 브런치를 시작했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고 한다. 혹시라도 재무/금융 쪽 진로를 생각하고 있는 학생 혹은 미래의 금융 전문가들에게 예전부터 내 이야기가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 개인사가 별 의미 없는 독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유사 진로를 계획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는 참고할 수 있는 케이스 스터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이런 경우도 있구나 하고.




수많은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필자도 10대 때 명확한 꿈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비전, 이런 것도 당연히 없었다. 어딘가에 취직해서 먹고살아야 될 거라는 생각은 했었지만, 그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알 길이 없었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으며, 본인 또한 크게 흥미도 없었다. 그나마 유일하게 내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평가 순위가 높은 대학, 혹은 취업 사정이 비교적 안정적인 학과에 진학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 가능성을 높이는 방법이라는 것 정도였다.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지만, 애초에 당시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이 학생들에게 진로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하기를 바라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선생님들을 원망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도 같은 혹은 그보다 못한 시스템에서 편협한 사고를 강요받아왔다고 생각하면 결국은 피해자이긴 피차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단 학교 공부를 잘 따라가기로 했지만 소위 말하는 SKY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성적이 신통치는 않았다. 공부보다는 여러 가지 책을 읽으면서 야간 자율학습 시간을 보냈다. 한 때 경제학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경제학의 매력에 매료되어 대학은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반이 되자 고등 수학을 요구하는 경제학 이론들을 이해할 자신이 없었다. 또한, 고등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취업준비학교로 전락해버린 대학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대한민국에서는 회사의 부품으로 내 인생을 바치는 선택지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외 유학을 계획했다.


부모님에게 신세를 지며 유학생활을 하긴 싫어서 군 장교생활과 아르바이트로 열심히 유학자금을 모았다. 열심히 모았다고는 하지만 학비가 말도 안 되게 비싸서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중하위 레벨 학교를 알아보았고, 전액 장학금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등록금을 요구하는 학교의 MBA 과정에 입학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보통 대졸자들보다 한걸음 앞서가는 커리어를 만들어 가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국내 취업시장에 미국 명문 MBA 졸업생은 발에 차일 듯이 많았고, 그 당시 미국 취업시장에서는 리먼브라더스 사태의 여파로 스폰서십이 크게 제한되어 미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가 아니면 아예 원서접수조차 받지 않았다. 어렵게 미국에서 파트타임 컨설팅일을 시작했지만 불안정했고, 한국 회사들은 대부문 경력직만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대로 한국에 돌아가면 날백수가 될 게 뻔했다. 지나고 보면 커리어나 학위에 대한 본질이나 실체는 잘 알지 못하면서, 그 진로에 대한 환상만 쫒아왔던 것 같다. 아무 미국 MBA만 따면 어떻게든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막연한 기대를 마치 종교와 같이 믿고 살았던 것 같다. 이런 것들을 정확히 알기엔 정보의 소스도 너무나 부족했고 본인의 노력도 부족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MBA기간 중에 성적은 매우 좋았다. 아마도 중하위권 학교여서 가능했으리라. 덕분에 지도교수님과 재무학 교수님들이 재무/금융학 박사과정을 권유해 주시면서, 이런 성적이면 학계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적극 추천해주셨다. 그래서 경영 컨설팅 일을 병행하면서 또다시 GMAT 공부를 시작했다. MBA 2년 차 재무학 수업을 가르쳐 주신 교수님의 추천으로 1년의 노력 끝에 캐나다에 위치한 교수님의 출신학교 재무/금융학과 박사과정에 생활비와 전액 장학금을 받는 입학허가증을 받았다. 너무나 뿌듯했고, 이제 뭔가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되기는 무슨. 그때부터가 또다시 시작이었다. 박사과정 수업은 과연 석사과정과는 레벨이 달라서, 수업시간 내내 당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채 강의실에서 연구실로 향하면서 과연 내가 박사 후보 자격시험을 통과할 수 있을까, 논문은 어떻게 써야 할까. 데이터는 왜 생각했던 대로 나오지 않는지. 매일매일 그만두고 싶은 나날의 연속이었다.


공부나 연구보다 힘들었던 것은 학생이라는 신분과 주머니 사정이었다. 박사 과정에 있다는 것은 그냥 늙은 학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주는 생활비는 2년 만에 끊겼고, 학부생 수업을 담당해서 가르치기도 했지만 월급은 적었으며, 아직도 내 공식적인 신분은 학생이었다. 학부생 수업이라도 맡지 못하는 학기에는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는 일도 생겼다.


어느 날은 가만히 세어보니까 초중고 및 대학과 대학원을 모두 합쳐서 학교에서 보낸 시간이 약 23년이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벌써 직장생활 10년 차가 다 되어가고, 안정된 직장에서 열정적으로 일하고 가지고 있는데, 나는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여기서 논문에 파묻혀 있나 생각했다. 서른이 넘어서면서 친구들과 스스로를 항상 비교하고 스스로 비참해했다.


여기를 벗어나면 뭐든 잘 될 것 같다고도 생각했지만, 그건 결국 환경을 핑계 삼은 자기 합리화였다. 어디에 있든 어떤 진로를 택했든 힘든 것은 대동소이한데, 어느 순간인가 나만 힘든 것 같다고 혼자 징징대고 있었다. 한국에 있었다고 해도 어차피 취직난을 겪었을 거고, 서울에서 커리어를 만들어 나가는 친구들도 뼈를 깎는 노력을 하고 있을 텐데. 더군다나 지금 이 생활이 힘들다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었다. 30넘은 무경력자를 채용해줄 안정적인 직장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없었다. 하는 수밖에.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성장했고, 우여곡절 끝에 박사논문이 완성단계에 다다랐다. 하지만 박사학위를 받으면 뭘 하나, 취직이 안 되면 그냥 고학력 백수인데. 당시 아직 제대로 된 오퍼를 받지 못했던 나는 커리어 공백을 피하기 위해 졸업을 주저한 반면, 나의 지도교수는 일단 졸업을 하는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북미 쪽에서 재무 금융학 박사 인력시장은 경쟁이 심했다. 연구실적은 있었지만 내 연구분야인 투자이론 쪽 박사들은 상대적으로 인기가 없었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기업금융을 연구하는 박사 인력들이 취업시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열리는 대규모 학회를 돌아다니며 여러 번 채용 면접을 봤지만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도 적었고, 적극적으로 채용하겠다고 하는 학교도 물론 없었다.


그래서 유럽으로 눈을 돌려봤는데, 유럽 박사인력 취업시장은 분위기가 달랐다. 요구하는 연구 분야도 다양했고, 북미 학교 출신 박사인력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수 개 학교와 면접을 보고 지금 직장에서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해 조교수로 채용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서, 일단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다.


조교수가 되었지만, 뭔가를 이룬 것은 전혀 아니다. 정년을 보장해주는 테뉴어를 받으려면 또 뭔가 실적을 내야 한다. 모든 교수들이 그렇지만, 알아주는 저널에 개제 되는 논문을 써내야 한다. 학생들에게 욕 안 먹으면서 교수평가도 잘 받아야 한다. 현시점에서 나는 그렇게 커리어를 만들어 가고 있다.




뭘 할지, 하고 싶은지 몰랐던 학생이었던 필자는 여러 가지 상황과 환경에 따라 흐르고 흘러 지금의 커리어에 도달하게 된 것 같다. 명확한 커리어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따라온 것은 아니지만, 기회는 언젠가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항상 잘 준비된 생활을 해왔던 것 같다. 물론 필자도 아직 커리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성공적이다 그렇지 않다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예비 금융전문가들이 이런 진로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선택지를 하나 정도 늘릴 수 있다면, 나의 시시콜콜한 개인사 이야기도 조그만 가치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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