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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바이어 Feb 17. 2021

스토리칼럼_ 1년에 딱 한 번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선배가 있다. 연말이든 연초이든, 간혹 그 시기를 놓치면 설 무렵쯤 연락을 해 술을 마신다. 20년 가까이 해온, 1년에 딱 한 번의 만남을 아직까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이번 주말에 깨닫고 코로나19가 무섭긴 무섭구나 싶었다. 


1년에 딱 한 번만 만나는 이유가 궁금할 필요는 없다. 살다 보면 자주 만나는 관계와 띄엄띄엄 만나는 관계와 아예 못 만나는 관계들이 있는데, 그 횟수가 친밀도를 구분하지는 않으니까.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시기가 겨울이다 보니 늘 추웠다. 그는 헤어질 때마다 어김없이 택시비(또는 대리기사비)를 찔러 주었다. 작은 사업체를 갖고는 있지만 돈이란 게 늘 부족하다 느끼는 게 인간이고, 그나마 은퇴한 지 제법 된 뒤에도 계속 돈을 찔러 주는 것이 부담스러워 물어본 적이 있다. 


“택시비 주는 거 인생 컨셉예요? 아님 내가 불쌍해 보여서 그래요?”


그다지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조금 당황한 듯 구구절절 설명을 붙였다. 줄여 정리하면, 오래 전 월급쟁이 시절이 떠올라서 그런다는 것이다. 술 마시고 집에 갈 때 너무 힘들었고, 취객이 대중교통 이용할 때 일어날 갖가지 우려가 떠올라서 그런다는 것이다(그가 대중교통을 이용해 귀가하다 뭔가 실수를 한 장면이 이것저것 떠올랐다).


아무튼 그 뒤부터는 편하게 택시비를 받았다.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선배가 처음으로 봄날에 연락해 온 적이 있다. 강원도에 내려와 있는데 (은퇴한 뒤, 한 농가를 구입해 그림을 그리며 살 때였다) 도다리쑥국이 먹고 싶다는 거다. 제법 먼 거리였지만 고민 없이 달려갔다. 산골은 아직 쌀쌀했고 도다리쑥국을 파는 식당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광어회를 먹고 매운탕은 맑게 끓여 달라는 식으로 모양새를 갖췄다. 그리고 노가리 안주와 맥주를 사들고 농가 숙소로 들어가 밤을 새웠다. 그때까지도 나를 부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정말 도다리쑥국 때문에 부른 걸까 (능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지만) 의아해하며 취해 갔다. 그리고 기억나는 대화다.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데 영 안 되네. 이제 그만 올라갈까 봐.”

“나이 들어 새로 뭘 배우는 게 어렵지요. 모든 게 굳어서 그래요.”

“몸이? 정신이?”



취중에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물었다. 갑자기 정신이 홱 들어 새벽이 오는 것을 느꼈다. 나이 들면 몸이 굳는 것을 누구나 안다. 하지만 정신이 굳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얼마 후 그는 그림을 포기했다. 그래도 인생 중 가장 그럴 듯한 시기였다고, 어느 겨울 1년에 딱 한 번 만나는 자리에서 회고했다.  


봄이 오면, 꼭 연락을 해야겠다. 맛 좋은 도다리쑥국 집을 발견했으니 햇빛 좋은 날 낮술 한잔 하자고. 매년 오는 명절에 꼭 조상을 찾아봬야 하는 시대도 건너가는 듯하다. 몸은 굳더라도 정신을 말랑말랑하게 하려면, 하던 대로 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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