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께서 20곡의 바이올린-피아노 곡목 리스트를 주신 건 작년 12월 말이었다. 20곡 중에 내가 해본 곡은 드뷔시 바이올린 소나타 1곡뿐이었다. 지난 6년 동안 거의 바이올린 반주만 하다시피 했으니 소위 말하는 스탠더드 레퍼토리 중에서는 안 해본 곡이 없다. 선생님의 리스트는 그런 스탠더드 레퍼토리를 모두 빗겨선 곡들로 채워져 있었다.
프로젝트에 다시 발동이 걸린 건 3일 전. 선생님의 전화로 한 달여 동안의 휴식과 정체와 기다림의 시간이 끝났다. 프로그램은 일사천리로 정해졌다. 실내악 레퍼토리가 선생님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나로서는 곡에 대한 그녀의 평가가 신기하고 경외스럽기까지 하다. 예를 들어 어제 하루 들어보면서 제일 귀에 쏙쏙 들어온다 생각했던 Beethoven Piano Trio Op.1의 3번은 '진부'하다 하시고, 2번은 시작하기에는 너무 무겁다고 하신다. Stenhammer라는 생소한 북유럽의 작곡가가 놀랍게 품위 있고, 로맨틱한 바이올린 소나타를 남긴 줄 처음 알았고, Amy Beach의 Romance는 전혀 Beach 스럽지 않게 따뜻했으며 (매우 전위적인 작품들도 많다) 15세의 Mendelssohn 이 남긴 Op. 4는 비장하면서도 우아했다.
프로그래밍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예술이다. 프로그램이 어떻게 작동되는지는 막상 연주회에 가서야 알게 되지만,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는 연출가의 입장이 되어서 관객들의 반응을 생각하면서 그날 연주의 나름의 기승전결을 의도해야 한다. 많은 곡들에 대한 사전 지식과 연주의 실제 경험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부함을 넘어서는 참신함을 발휘하려면 늘 새로운 곡에 대한 탐색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선생님의 나의 제안의 일부를 참조하시고, 일부는 걷어내셨다. 대화가 솔직해서 좋았고, 그녀의 사고가 움직이는 방향을 들으면서 한 연주에서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예민한 예술가의 촉을 느꼈다. 너무 쉬워도, 너무 길어도, 너무 무거워도 나쁘다. 그러나 한 방이 있어야 하고, 질펀하게 발산하는 대목도 있어야 한다.
하루의 논의 끝에 프로그램은
Concert 1) 낭만적인 밤으로의 초대
A. Beach, Romance - F. Mendelssohn, Sonata Op.4 – W. Stenhammer, Sonata
Concert 2) 우리의 영웅, 베토벤과 말러
L.v.Beethoven, Piano Trio Op.1 No.1 - G. Marler, Piano Qaurtet – L.v.Beethoven, Piano Quartet Op.16
Concert 3) 바흐, 쇼팽, 슈만의 기념일을 맞이하며
JS. Bach, Sonata No.1 – F. Chopin, Piano Trio – R. Schumann, Piano Quartet
로 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