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카카오톡의 '나만의 채팅방', '캘린더', 함께하는 독서모임의 '오픈카톡방' 등엔 많은 글과 메모가 담겨있다. 마인드맵도 꽤 많이 그려져 있다. 어떤 것은 키워드 몇 개, 어떤 것은 단 하나의 문장, 어떤 것은 700자가 넘는 혼잣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늦잠으로 헐레벌덕 출근길을 준비하느라 대충 머리를 말린 체 생각이라는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삐죽삐죽 오타투성이에 땀내가 담긴 글들이다.
이 글들은 하루하루 기록되어 온 나의 모습들. 나의 생각과 시간의 발자취임이 틀림없다. 글들은 대체로 꾹! 꾹! 눌러 압축이 되어 있다. 비밀번호도 단단히 걸려있다. 내 머릿속의 비밀번호를 넣어 풀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글들도 있다. 어떤 글은 방치라는 최첨단 장치로 보안강도를 대폭 올려 정작 주인인 나조차도 당분간은 풀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이런 메모들이다.
"첫걸음. 눈물이 날 것 같다." 소중한 날을 잊지 않기 위한 마음의 소리.
"그래도 아빠처럼 살긴 싫어요"라는 11살 딸아이의 의미심장한 말.
"복숭아 아르레기 있다는데 왜 자꾸 복숭아를 주는 거야!!"라는 울분에 찬 혼잣말.
"오늘도 별은 떴다... 송별.. 그리고 소주 한잔"이라는 씁쓸함을 담은 마음.
"사랑, 희생, 의무, 나, 우선순위?"라는 조금은 있어 보이는 키워드들.
"사람은 사랑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갈 수는 있다. 다만 쓸쓸할 뿐이다."라는 어느 책과의 철학적(?)인 대화.
그렇게 매일매일 글들이.. 생각이.. 쌓여가고 있었다. 쌓여가는 글들 위로 뽀얀 먼지들도 함께... 나름 미니멀 리스트를 선호한다 자신 있게 말했는데 적어도 생각의 정리에선 영락없는 맥스멈 리스트다.
'언젠가는 쓸데가 있을 거야.'란 생각으로 이것저것 모으기만 하는 어리석은 맥스멈 리스트. 정리 용역업체를 부르면 감당 못할 견적이 나올 것이 확실시된다.
"정리정돈이 필요해!"
학창 시절 어렵게 마련한 컴퓨터 깊숙한 곳엔 새 이름의 폴더들이 있었다. 꽤 많이. 직박구리, 할미새사촌, 메추라기, 논병아리, 새 비둘기, 가마우지와 같은 폴더들. 왜 이런 폴더명들이 있었는지는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다. 부끄러우니까. 다만 조류학자가 꿈은 아니었음을 분명히 밝힌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당시 새 폴더를 만들면 자동으로 새 이름을 가진 폴더명이 만들어졌다.
새 이름 폴더를 새(new) 이름(name)이라는 콩글리쉬 해석을 가미한 이공계의 재치이자 위트였다고 알고 있다. 취향저격이다. 이런 걸 보면 공학도들에게 대한 불명예스러운 고정관념에 대한 재고가 필요해 보인다.
지금 나의 메모들이 딱! 이런 느낌이다. 분명 나의 취향이고 나의 생각인데 남에겐 보여주기 부끄러워 애써 정리하지 않고 대충 우기고 쑤셔 넣어둔 느낌. 그리고 혼자만 즐기는 즐거움. 물론 혼자만의 즐거움도 좋다. 하지만 가끔은 친구들과 함께 보고 싶은 것들도 있다. 이런 생각들이 들자 그동안 말 못 하던 속내들이 쑥스러운 듯 손을 들며 작은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건넸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 못 한다면 너무 아쉬워요... 그러니 남겨주세요.'
'지금 이 아이디어들을 분명 쓸모 있을 거예요. 그러니 남겨주세요.'
'지금 이 생각들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요. 그러니 남겨주세요.'
이럴 때 나타나는 녀석이 있다. 바로 '자기 검열'이라는 것이다.(참고로 난 트리플 A 형이다) 이 녀석은 일진역할을 톡톡히 한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는 부끄럽고 자신 없는 부분을 정확히 파고들어 비수를 찔러댄다. 애써 낸 용기는 땅바박으로 흘러내린다. '아냐! 내 글도 괜찮아!'라고 외침만으론 부족하다. 조금만 둘러봐도 화려한 글거리엔 훤칠한 키에 딱 벌어진 어깨 트렌디한 복장의 멋들어진 글들이 여기저기 수두룩 빽빽하니까. 자기 검열이라는 덩치 큰 녀석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데 예전 어느 방송인의 말이 떠 올랐다. 그는 자타공인 멋진 이들과 다른 외모를 지닌 방송인이다.
"잘 생긴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고마워해야 해요. 왜냐! 우리 때문에 잘남이 더욱 빛을 발하니까."
그의 말이 맞다. 번화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다양함을 이루고 그 다양함이 거리를 활기차게 만든다. 글거리도 같지 않을까. 저마다의 독특하고 어설픈 개성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닐까. 비교대상이 없다면 멋짐도 없다. 그러니 내 글도 조화의 일부분일 될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 결심했어! 나도 글거리에 나가 놀 거야! 뭐 못났으면 어때. 못나면 못난 대로 놀면 되는 거지'
저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나 또한 나만의 이유가 여럿 있을 것이다. 아직 찾지 못한 이유도 있을 테고 말이다. 분명한 건 일상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희로애락의 여러 감정과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글이라는 도구로 기록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는 것은 확실한 듯하다. 그리고 매년 어김없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생각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을까도 싶다.
'분명 부지런히 살고 열심히 노력한 것 같은데 올해도 이룬 게 하나도 없네.' 란 생각.
어쩌면 남기지 않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지금의 이 생각과 다짐을 잊지 않고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내가 부러워하던 그들과 브런치를 같이 먹으며 글거리에서 즐거운 대화의 시간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훗날 비밀번호가 풀린 나의 글들을 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본다.
"그래. 이 정도면 쓸(write)만 하고 쓸(use)만 한 삶이었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