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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눈부신 Nov 23. 2023

한의사와 점쟁이

어제 있었던 일이다. 몇 달간 꾸준히 오시는 80세 남자 환자분은 매번 화요일과 금요일 아침 첫 타임에 진료를 보시며 내 아침을 즐거이 열어주는 분이다.

그런데 어제 유독 평소답지 않게 침울한 환자분을 뵈어 이유를 여쭤보니 주말에 점을 봤는데 내가 내년 봄이면 허리가 많이 안 좋아져 척추 시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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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분은 20년간 척추관 협착증을 앓고 계셨다. 척추관 협착증이란 척추관에 여러 퇴행성 변화가 발생해 우리의 척수, 신경이 지나다니는데 장애를 받아 발생한다.

이를 더 쉽게 설명하면 결국 척추관이라는 파이프에 물때가 끼고, 이 때문에 신경이 지나다니다 어디선가 방해를 받아 발생한 증상들을 일컫는다.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신경인성 파행이 있는데, 이는 다른 게 아니라 오래 걷지 못하는 증상이다. 걸음을 멈추고 조금 쉬면 나아지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다리가 저리고 감각이 무뎌지는 증상이 거듭 나타나는 것이다.

사실상 만성 퇴행성 질환에 가까운 이 질환은 현 증상의 악화를 막고 당장의 불편감을 관리하여 삶의 질을 상승시키는데 집중한다.


그렇지만 환자분은 내 입장에서는 꽤 귀여운 이유로 침을 맞으신다. 화요일과 금요일에 춤 수업이 있는데 10분만 추면 다리가 저려 한참을 앉아 있다가 다시 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파트너와 함께 추는 춤이다 보니 본인이 쉬면 파트너도 함께 쉬어야 해서 갖은 눈살과 불평 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여기서 침을 맞고 가면 쌩쌩해서 파트너에게도 면이 살고 아주 용하고 좋더라는 이야기다.

삶의 다른 어떠한 불편감보다 사실상 춤을 잘 추기 위해 침 치료를 받는 할아버지라니. 이 얼마나 귀여운 이유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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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지난 주말, 수원에서 굉장히 용하다고 소문난 분이 대치동까지 와 점을 봐주셨는데 할아버지에게 내년 봄이면 허리가 많이 안 좋아진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때 안 좋으면 척추 시술을 받고 그 시술은 반드시 강남 세브란스에서 받아야 하며 (허, 이 얼마나 구체적인 구제책인지!) 시술을 받아도 꽤 오랜 기간 고생할 것이라 하니 다소 침울해 계셨던 것이다.

20년간 관리해 오던 허리가 당장 몇 개월 뒤에 나빠진다는 얘기를 듣는데 누군들 속상하지 않을까. 나는 침을 놓으며 이럴 때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환자분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 생각했다.

정색하고 그 말은 진실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을 전하는 것일 뿐 환자의 마음을 얻는 데는 별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점쟁이의 권위 있는 말(?)을 들어 놓고 난 뒤라 무슨 이야기를 해도 듣지 않으실 것 같아 결국 선택한 건 너스레.

"환자분, 저는 내년 봄까지 이곳에서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아버님 진료를 봐드릴 거예요. 제가 최선을 다해서 내년 봄까지 그 운을 피할 수 있도록 노력해 볼게요. 어디 점보시는 분이 이기나 제가 이기나 내기 한번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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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사는 유독 세상과, 혹은 세상의 편견과 싸워야 할 일이 많다지만 이런 날은 무속 신앙과도 싸워야 하니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나도 참 궁금하다. 어디 누가 맞나, 어서 내년 봄이 와 누가 길고 짧은지 한번 대봅시다.


2023. 11. 창덕궁 내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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