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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Jan 11. 2022

표영삼선생 동학강의-8

2005년 봄 - 4,  3월29일 

포(包)와 접(接)

포(包)는 여러 개의 접(接) 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수백의 접을  헤아리는 포도 있고 수십인  포도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동학의 조직은) 처음에는 접으로 시작되고 그 이후 포가 나왔습니다. 한 계통의 인맥, 그 인맥을 통해서 포가 생긴 것입니다. 

접이 인맥관계이듯 포도 인맥 관계에서 형성이 되었습니다. 지역조직과 인맥조직을 구분해서 이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3.1 운동 등을 봐도 우리 교구가 앞장서는 일이 없습니다. 동학운동은 지역 조직인 교구가 알어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접이나 포가 합니다. 포가 일어나서 사회적인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교구(교)는 하나의 성스런 장소를 중심으로 조직이 이루어진 게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한 것입니다. 교는 일상 생활화가 되어 있습니다. 유대교가 일상생활과 종교생활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동학은 운동 주체가 언제든지 포가 되고 접이 되는 것입니다. 동학의 특성은 개인이 일어선 게 아니라는 점을 유의하기 바랍니다.


포가 위냐 접이 위냐? 이는 새삼스러운 문제입니다. 남북접 (남접, 북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런 말은 없습니다. '북접'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사람이 늘어나니 수운 선생이 일일이 다니면서 포교를 할 수가 없어서 북쪽 은 해월 선생에게 맡겼던 것인데 그 때 나온 말입니다. 북도중( 中) 남도중(南道中)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해월 선생이 워낙 고지식 하다보니 꼭 북접이란 말을 썼습니다. 나중에 학자들이 그것을 가지고 '북접은 해월이면 남쪽은 누구냐? 서장옥이다. ' 이렇게 규정을 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남접주인이라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게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것이 이상하게 나눠져서 북접이 있으니 남접도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해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고 기록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이 여기서 더 나아가 보은취회에서 남접 북접이 대립이 되었다는 식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남접, 북접이라는 말이 있으니 포보다. 접을 위로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그런 말이 있을 뿐이지 근거가 없습니다. 남쪽 접주의 임명장을 발행한 자료를 보면 발행한 사람이 해월 선생입니다. 남쪽 서장옥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동학혁명이 끝난 다음에 서장옥이라는 이름이 나타났습니다. 그 전에는 기록에 없습니다. 정통적인 해석은 포가 위고 그 산하에 접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동학의 조직체계

대도주(법헌)大道主(法軒). 법헌의 뒤는 이름 뒤에 붙이는 헌(軒) 자로 가장 위에  위치되는 사람을 헌이라고 합니다. 법헌 이라고 하면 불교적인 용어인데 동학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 최고의 자리에 계신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987년에는 법헌이라고 그랬습니다. 동학기행에서 문바위골에 갔을 때 안내판에 최법퍼리라고 쓰여있는 것을 본 사람이 있을 겁니다. 다른 게 아니라 최법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부르다 와전된 것입니다.  도차주(道次主)라는 용어도 있습니다. 도차주라는 말이 한때 있었습니다. 접주 중에서 으뜸가는 접주라는 말입니다. 계속되지는 못했습니다. (강시윤-동학혁명사)  

이후에 편의장(便義長)이라는 말이 들어갑니다. 왜 편의장인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는 일은 포조직이 여럿 있어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데 그것을 조정해 주는 사람, 신속히 바로잡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편의장이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전라도에만 있었습니다. 좌도, 우도에서 (전라도의 왼쪽, 우측) 두 편의장 제도를 두었습니다. 그 다음에 포가 있습니다. 포의 우두머리를 큰접주, 대접주라고 했습니다.


육임제 

동학의 이러한 조직체계에, 육임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급수가 있습니다. 세 가지 종류로 보면 

1. 교장(敎長), 교수(敎授): 교(敎) 원로격으로 가르치는 역할, 인덕이 있는 사람 . 

2. 도집(都執), 집강(執綱) : 집(執) 사물을 집행하는 역할, 살림을 도맡아서 하는 사람 .

3. 대정(大正), 중정(中正) : 정(正) 규율을 바로잡는 역할 


편의장 

편의장은 강원도에는 없고 오도에만 있었습니다. 각 도에 편의장이 임명이 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총괄하는 사람이 오도편의 장이라고 했습니다. 편의장 중에서 으뜸가는 사람입니다. 갈등을 조절하는 역할이 편의장인데 이 편의장이던, 사람이 분쟁의 당사자인 적이 한 번 있습니다. 우(右)도의 군상오(君相五)와 좌(左)도의 남계천( 天) . 이 둘이 나눠져서 분쟁을 하니 해월 선생에게 도와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백정 아들에 게 지도를 못받겠다'고 하니 해월 선생이 중재를 한 유명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지영 선생 기록에도 나와 있는데 해월 선생이 여러 가지 설파를 하는데  핵심은 '우리나라에서 적자니 서자니 하는 싸움이나  양반이니 상놈이니 등의 싸움이 나라를 망치는 것이다. 적자, 서자는 집안 망치는 근원이다. 수운 선생의 예를 들면 종의 신분인 여아를 한 여자는 며느리 삼고, 한 여자는 양딸을 삼았는데, 수운 선생이 뭐가 모자라 그랬겠느냐' 는 말로 설득을 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다. 같은데 양반 상놈은 낡은 전통의 유물이다. 이렇게 설득을 하니 모여들었던 사람이 할 말이 없어 물러가고 해결이 되었습니다. 물러가지 전에 우도 편의장을 그만두도록 하려 하였더니 한 술 더 떠서 남계천을 우도 편의장 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개중에는 해월 선생이 중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로 기록해 놓은 것도 있는데 앞서 얘기한 공주민란 때 교조신원운동하자고 사람을 다섯 번이나 보냈는데 해원 선생이 정하지 않았느냐, 무원칙의 사람이 아니다. 에 월 선생 나름의 기준이 있다. 이게 알맹이인데 그것을 설득하는 것도 원칙이 있다. 그 원칙, 가치관, 인간관을 가지고 설득을 한 것이지 말재간으로 한 것이 아니다. 


저 베는 누가 짜고 있습니까?  - 천주직포(天主織布) 법설   

해월 선생이 청주 지역과 진천 지역을 오갈 때였습니다. 증평 아래 초정약수가 있는 대주리라는 곳에 서택순이라는 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양반이 대주리 대접주입니다. 그곳에 점심때가 되어 들이 어갔는데 안방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사랑방에 제자들도 오고 점심상을 다 먹고 물렸는데도 베 짜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러니 베 짜는 사람은 점심도 거르고 계속 베를 짜고 있다는 건데, 베 짜는 소리를 들으 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겠지요. 해서 선생에게 물었지요. '저 베는 누가 짜는 소린가? ' 그러니 '우리 며느리가 짧니다.' 서택순이 답을 합니다. 이 소리를 듣고 해월 선생이 ' 그 베는 며느리가 짜느냐 한울님이 짜느냐?' 하고 또 묻는데 아무 대답도 못하더랍니다. 그 때는 별 말씀 없이 지나가셨는데 나중에 천성산에 와서 제자들에게 그 얘기를 다시 합니다. 서택순에게 내가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더라고 한 후에 설명이 없었습니다. 한울님이 짜느냐 며느리가 짜느냐 물어놓고는 아무 설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해석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곁들이는 게 해월 선생의 말씀에 손상이 갈까봐 얘길 못하겠습니다.


사람은 언제부터 한울님을 모신 것인가? 

유시원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위에 한 이야기 보다 7,8년 앞선 이야기 입니다. 그 사람 집에 가서 개접을 해 놓고(개접은 토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곳에서 화두 두 개를 던져 주었습니다. 하나는 시천주(侍天主),우리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그런 것인지 맞춰보아라 하셨습니다. 하나는 포태(胞胎)했을 때부터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배에서 떨어지자마자로 봐야 하는가? 마지막으로 수운 선생처럼 깨달은 이후부터 한울님을 내 몸에 모셨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물으셨습니다. 이 또한 질문만 던져 놓으시고 설명을 안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이렇다. 저렇다 대답을 했는데 이후에 해월 선생이 하신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서 기록에 빠뜨렸는지 진짜 아무말이 없으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향아설위 (向我設位)

또 하나의 화두는 차례를 지낼 때 나를 향해 지내야 하는지 벽을 향해 해야 하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렇게 질문만 던진 후 ' 답이 없다가 1898년에 했습니다. 1878년에 던진 질문을 20년이 지난 후에 대답을 한 것인데, 제사상을 나를 향해 돌려놓으라고 지시를 한 것입니다.

대답은 모두 한 가지 문제에 걸립니다. 해원 선생이 문제를 또 던지는데 , 결론을 낸 후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강원도에 왕곡이라는 곳이 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 군대와 미군부대가 같이 사격장을 만들어 버려 아무것도 남아있는 게 없습니다. 해월 선생이 그곳에 계실 적에 아침을 자시고 난 후에 가만히 있다 보니 새 소리가 짹짹짹 나더랍니다. 그 때 제자 들에게 저 새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아느냐하고 묻습니다. 갑자기 새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물으니 그냥 새소리지 하는데, 해월 선생이 대답을 합니다. 한울님의 소리라고 한 것입니다. 생명이란 말입니다. 생명이 한울님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위생 관념

한 가지 더 덧붙일 것은 위생관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동학이 왜 민중들에게 집중 되었는지 그걸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민중들이 많고 많은 종교들도 있었는데 동학에 붙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같은 접에 들어오게 되면 다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존경하게 됩니다. 양반 상놈이 없어지고 경어를 쓰고 죽이라도 나눠 먹고. 유무상자하고 생활 속에서는 아이도 한울이니 치지 말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도 있지만 위생준칙의 면도 있습니다. 요즘에 얘기하는 위생 차원으로 이해하면 부족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찬밥 더운 음식 섞지 말고 묵은 음식 새로 끓여 먹어라', '집안을 청결히 해라', '가신 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대변을 본 뒤에는 땅에 묻어라' 등 입니다. 해월 선생이 전성 에 와서 특별히 위생 문제에 경계를 했습니다. 그 해 6월부터 콜레라가 돌았는데 사람들이 막 죽어 나갔습니다. 찬바람이 불고서야 그 게 사라졌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기록을 찾아보았더니 그 시기가 일치합니다. 우연한 일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동학하는 사람들이 그 병을 덜 앓았습니다. 동학하는 사람은 콜레라도 안 걸렸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그 해 가을부터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해월 선생이 60세 되던 해인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사회적인 변란이 일어나면 대개 조직이 축소되어야 하는데 사람이 자꾸 몰려든 것은, 사람들에게 몇 가지가 눈에 보였던 모양입니다. 해월 선생이 '부엌을 깨끗이 해야 한다. 그래야 복을 놓고 간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이 귀에 쏙 들어옵니다. 부녀자들이 귀에 쏙 들어가지 않았겠냐 이 말입니다. '복 받으려면 부엌을 깨끗이 해야겠구나' 한 것입니다.

해월 선생의 기본적인 생각이 수운 선생의 생각입니다. 수운선생 생각에서 가장 핵심 되는 것이 이중세계를 타파하는 것입니다.  한울님 하면 (생명) 유일, 인격, 내재, 되어감(생성)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유일(唯一) : 

다른 세계가 있을 수 없이 유일하다는 얘기입니다. 이 세계가 있고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성 세계와 초감성 세계를 이제껏 믿어왔는데 그것은 결정론적 요소가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 모순입니다. 수운 선생은 음양이치를 고사하고 유일한 세계밖에 생명을 지배하는 세계가 또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합니다. 동학은 그렇게 가르치다보니 양반 상놈이 있을 수 없는 겁니다. 근본적인 생각을 바꿔야 하는 것입니다.

인격: 이 부분은 설명하기가 곤란합니다. 나의 생명의 씨앗이 아버지 어머니인데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겠습니까. 내 위로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보니 인격적으로 모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의 유일성보다 강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내재(內在):  

생명은 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세포 얘기를 하는 것이 잘 맞겠는데 세포는 따로 따로 떨어져서 혼자 살 지 못합니다. 개체 속에서 서로 존재해야지 서로 주고받으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개체 혼자 존재할 수 있느냐. 온 천지. 생명체계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온천지 생명체계의 신령스런 수십 억이 걸어 나온 곳을 축소하고 축소해서 내 몸 안에 씨앗으로 존재한다는 것.  내재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되어 감 (생성) : 

시간성이 있을 뿐 시간을 떠나서 초월해 있지 않습니다. 초월해 있다는 것은 존재자로서 있지 않는 것, 여기 에 용납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이 시간적 이라는 것. '되어져 가는 과정'에 있는 것. 이미 마련되어 있는 생명이 아니라  되어져 가는 과정입니다. 설계도가 없습니다. 다리 만드는 것처럼 설계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하고 있는 과정에서 시간성만 있는 것이지 전제자로서는 아닙니다. 점쟁이가 점을 치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과거는 맞추지만 미래는 맞추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갈림길에서 인간이 결단해야 하는 것인데 여기에 당위성 사명감 이런 것이 작용할 것입니다. 당위, 도덕적 의무를 가지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결단하지 않으면 그게 죽음의 길인지 삶의 길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질문과 답 

질문: 이중 세계를 부정한다고 하셨는데 동학혁명 당시에 부적을 붙이고 싸움터에 나가 싸웠는데 옆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부적을 사용한 것은 무엇때문입니까? 

답 : 전쟁터라는 곳은 평상시 생각과는 다릅니다. 관군을 상대로 싸우는데 무기라도 해봐야 기껏해야 30m 안에 쏠 수 있는 화승총이고 무모하게 짝이 없습니다.  농사짓던 사람들, 아무런 싸움 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나오라니 다 나왔는데 얼마나 공포스럽겠습니까. 지금도 경찰하고 싸워라 군대랑 싸워라 하면 얼마나 부담스럽고 두려워요. 그 때 위안을 찾는다는 말이죠. 운동선수들도 시합 전에 손톱을 안 깎는다하는 뭐 그런  행동을 하는데 시합하는 사 람들도 그런데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죽고 사는 문제인데 비판의 여지가 없습니다. 붙이면 안 죽는다더라 하니까 알면 서도 했다하는 그런 얘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몰았다고는 보지는 않습니다. 민족적인 차원에서 외세를 몰아내자하니 죽을 지도 모르는 공포 속에서도 나갔단 말이죠, 자유롭게 도망칠 수도 있었어요. 뒤에 헌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뭐가 있어요. 도망가면 그 뿐인데 싸움터 뒤에 따라온단 말이죠. 그 속에서 지도자가 '부적을 달아보자 총 안 맞는다' 하면 다 같이 붙인 거지요. 엉터리 같은 제 해석이죠.

질문: 해월 선생이 천어를 들으셨을 때 그게 천상천하 유아독존 의미의 깨달음이었는지 궁금하고 이원의 불변적인 해석이 시천주로 가는 부분에서 근거가 미약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천주를 풀어내는 방법에서 원불교에서는 중도에서 풀어라 하는 말들을 하는데, 개인적인 의문은 혁명이라는 부분은 너도 죽고 나도 죽자는 부분인 아닐까 싶습니다. 

답 : 천어 부분은, 사람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껍질을 벗어버리며 순수한 의미로 살고 싶다는 게 남습니다. 살고자 하는 겁니다.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 해원 선생 같은 경우 남들은 천어를 다 들었다 하는 데 본인은 안 들려오더랍니다.  마지막까지 안 들리더랍니다.  순수한 생각, 수운 선생의 생각이나 해월 선생의 생각이나 마지막까지 올라가면 모두가 똑같아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 저것 다 해보니 이거 내가 공연한 짓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 순수 하게 들여다보니 건강한 몸도 찬물에 갑자기 들어가면 몸에 해롭다는 생각이 똑같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내려가기만 하 면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일반 선상에서의 깨달음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모든 성인들, 석가모니, 예수 등은  시대적인 옷을 입혀서 다른 것 같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같은 것 같습니다. 해월 선생 스타일로 해석을 하면 해월 선생 스타일로 가는  것인데 수평선상에서 보면 동일하지 않겠는가. 종교 간은 서로 원수가 아닙니다. 따지고보면 천도교의 자체가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저는 생명이라고 해석을 하는 데 모든 종교가 생명으로 귀결됩니다. 내 것은 옳고 네 것은 틀렸다가 아닙니다. 다종교 시대는 남이 하는 것도 인정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성리학이라는 것이 들어와서 예전엔 그렇지 않았는데 이것은 나쁘다 해서 천시하고 그 랬단 말이죠. 지금이라도 인정을 해야 합니다. 폭넓게 해야 됩니다. 기독교에서 하는 좋은 말,  원수도 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옛날 기독교, 불교도 옛날 불교가 아닙니다. 자꾸만 변해 갑니다. 어떻게 변해 가느냐? 국민소득 2만불 넘어가면 종교가 되질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 개혁을 해야 합니다. 너무 지나친 얘기 같지만, 내가 아는 것은 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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