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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작나무 Feb 18. 2022

표영삼 선생 동학강의 -9

2005년 10월 1강(10월 19일) 수운회관 

2005년 10월 19일, 수운회관 

2005년 가을에도 표영삼 선생을 모시고 동학강좌를 열었다. 10월 19일, 26일 두 차례 강의를 진행했고, 10월 29일(토)~30일(일) 1박2일 공주 일원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동학혁명에 대한 인식은 그래도 많이 달라졌다.  갑오년 혁명 100주년 때 이북에서도 꽤 비중 있게 다루었다. 그러나 여전히  '갑오농민전쟁'으로 지칭하며 동학은 단순히 '외피' 였다고 보는 관점은 여전하다.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심의위원회법'이 제정되고 위원회가 출범해 동학혁명 참가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아직 홍보가 부족해 심의신청자가 턱없이 적지만 시대변화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혁명 참가자의 직계자손 등 신청자들이 할머니나 관련자들로부터 청취한 내용을 말하면 일본 기록이나 관변기록, 연구자들의 자료와 대조하여 개연성이 있으면 인정을 하고 있다.

동학혁명은 각각의 입장에 따라 '농민전쟁',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 등으로 말한다. '농민전쟁'으로 보는 관점은,  갑오년 혁명에서 동학은 단순히 혁명의 명분으로 뒤집어쓴 명분에 불과하다는 뜻에서 '외피설', 혁명의 이념적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라고 해서 '원용설'을 말한다. '농민전쟁' 관점은 엥겔스가 16세기 독일 농민전쟁에 대해 계급혁명의 전단계로 분석한 것을 차용한 것이다. 이 관점은 ' 농민혁명'도 인정하지 않는다. '농민전쟁'일 뿐이다. 농민은 임노동자도 아니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타파할. 진정한 혁명적 자각에 도달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역사학자들도 동학은 종교일 뿐, 혁명에 나설 수 없다는 견해를 말한다. 이들은 무위이화(無爲而化)를 들어 동학을 정감록과 같은 운명론, 결정론으로 규정한다. 공산주의는 단계적 발전사관에 따라 역사가 진보한다고 보고, 동양에서는 한 왕조가 끝나면 다른 왕조가 시작되는 것처럼 역사를 순환하는 것으로 보았다. 수운선생은 역사가 순환하지만 어느 순간엔가 다른 단계로 올라서는, 순환사관에 발전 사관이 더해진 관점을 가지고 계셨다.


모든 종교는 결정론, 운명론이지만 수운 선생은 이를 배제했다. 수운선생이 말한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에서 '다시 개벽'은 새로운 삶의 틀, 다른 문화의 틀이 필요하다는 '과제 상황'을 표현한 것이다.

동학은 대부분의 종교에서 말하는 감성 세계와 초감성 세계, 이승과 저승의 구분 같은 이중적 세계관을 부정한다. 생명체는 끊임없는 생성 발전을 통해 향상하려고 하고 복제를 통해 존재를 이어가려 한다. 수십억 년 전 지구에 처음 출현한 태초의 생명이 끊임없이 이어져온 존재인 내가 있을 뿐이고 죽으면 자기복제 를 통해 존재가 이어질 뿐 나 자신은 해체된다. 어딘가에서 와서 어딘가로 간다는 식의 이중세계관은 아닌 것이다.

또한, 세포가 단독으로 생존할 수 없듯이, 개체 생명체는 온 우주 생명의 일부분으로 생명을 이어간다. 여기서 신이나 한울님은 온 천지생명체계의 최고가치체계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부단하게 흘러가는 그 움직임 자체일 뿐, 원래부터 있어왔던 존재, 초월자로서의 신은 부정하고 있다. 또한, 역사란 인간의 선택에 의해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다.

동학은 다른 종교들의 결정론처럼 예정된 결론에 도한다는 주장을 부정한다. 수운 선생이 이야기 하는 다시 개벽은 - 기존의 관념과 인식 틀로는 개선이 불가능한 '전혀 새로운 삶의 틀'이 불가피한 현실에 대한 진단이며 전혀 새로운 인식체계 삶의 틀을 가리킨다.

동학은 반상(班常), 적서(嫡庶), 남녀, 노소의 차별을 철폐하려고 했다.

과연 어느 혁명이 이 모든 차별을 넘어서려고 했었던가. 볼셰비키 혁명은 여성에 대한 차별철폐를 내세웠지만 유산계급을 적대시했다. 반상의 차별을 넘어서려고 했던 동학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현실을 철저히 바꾸려고 했던 동학을 혁명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박헌영이나 이북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동학혁명에 대해 민중의 폭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동학을 외피로 뒤집어 쓴 것이고, 도구로 '원용'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갑오년 혁명은 가혹한 착취에 맞서 기포(起包)한 것이다. 기포는 포 조직이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무장하고 일어났다는 말이다. 누가 누구에게 조직을 빌려주거나 하는 것이 아니다.

동학은 '어린 아이 치지 마소서 어린 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어린 아이 치는 것은 한울님을 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누가 베를 짜고 있습니까. 며늘아기가 베를 짤니까 한울님이 짭니까' 같은 해월 선생의 말씀에 나타나 있 듯, 신분제 철폐 등 개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처음에는 사회변혁을 위한 움직임이 적었지만 교조신원운동,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운동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혁명적 지향을 분명히 하게 되었다.보은 취회 때 조정에서 파견된 어윤중과 동학 지도부 사이에 오간  대화를 기록한 내용 중에는 당시의 집권세력인 '민씨 정권 축출'을 요구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어윤중이 이를 조정에 보고할 때 누락시켰다. 감히 집권세력인 민씨들에게 이 말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갑오년 동학혁명 때 군주제(君主制), 신분제(身分制), 민회운동(民會運動). 합의제(合議制), 폐정개혁 (弊改改革)에 대해 동학이 주장한 내용을 살펴보면 초보적인 의회민주주의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군주제

군주제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동학에서 군주제를 철폐하자고 주장한 내용을 발견할 수 없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내용을 강조한다. 실제로도 홍계훈이 이끄는 관군과의 접전도 '임금의 군대와 싸울 수 없다'면서 접전을 피한다. 무장에서 봉기한 동학군이 관군과의 조우를 피한 채 영광, 함평을 돌아 장성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전투가 벌어진다. 실제로 전주를 점령할 때도 무혈입성 했다. 왕에 대한 문제제기는 없고 현명한 신하가 없어서 당시의 사회적 문제가 빚어졌다고 말한다. 초기에는 민씨 정권을 축출하고 그 대안으로 대원군을 내세우자는 의견도 있었다.


신분제도 

철저하게 차별철폐의 입장을 내세웠다. 내 안에 신을 모신 존재가 있을 뿐 양반과 상인, 적자와 서자, 남자와 여자, 어른 아이를 구별하고 차별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모두가 안에 한울님을 모신 존재로서 서로를 섬기는 것이다. 서양의 평등의식이나 인권의식이 수입된 것이 아니라. 독특한 인식체계를 스스로 세운 것이다.


민회운동(民會運動)

민회운동(民會運動)은, 보은과 원평에 3만 명이 운집해 '척왜양창의'를 외치면서 일본과 서양세력을 분명하게 침략자로 규정했다. 조정에서 내려온 어윤중에게 7인의 대표들은 '몸에 촌철조차 지니지 않은 우리가 어째서 역도란 말인가. 외국에는 민회가 구성되어 제도와 법령을 개선한다고 한다. 우리들 역시 민회를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 무렵 구성된 일본의 의회를 염두에 둔 듯 하다. 당시 지도부가 식자들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국제정세나 해외정보에 밝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지향은 봉건적인 현실을 넘어서 민주적인 정체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합의제(合議制) 

전봉준 장군이 체포된 뒤 일본군들에게 조사를 받을 때, 거사에 성공하면 무엇을 하려고 했느냐는 질문에 대해, '정치는 현명한 사람을 여러 사람 뽑아 서로 합의해서 운영하게 하고 나는 농사를 지으러 돌아가려고 했다' 답했다.


폐정개혁 (弊政改革) 

부패한 집권세력을 축출하고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제하고 동학혁명이 추구한 것은 초보적인 의회민주주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려는 것이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다만, 동학혁명에서 빠져있는 부분이 '경제개혁'에 관한 부분이다. 토지제도, 상업 등 경제제도에 대한 언급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지영은 '토지 평균분할'을 얘기하고 있지만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 의문스럽다. 폐정개혁안 12개항의 기록도 1924년 25년에 기록된 것과 1945년의 기록은 무려 9개나 차이가 난다. 기록자가 가필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한 부분이다. 월북한 사학자 오길보 역시 강진 출신 교도들이 정약용 유배지에서 구한 경세유표 등  실학서적을 전해주어 지도부가 '균작'을 주장했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에 기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질문과 대답 

문:  동학에서 '교육'에 대해서는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지 소개해 달라는.

답:   '신(信) ·경(敬)·성(誠)'이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신(信)은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말은 어느 것이 옳은지 생각하되 재삼 생각하라'고 했으며, 신이란 '옳은 것을 선택한다'는 의미다. 경(敬)이란 반복의 의미이고, 옳은 것을 공경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옳은 것을 자기화하는 의미다. 성(誠)은 바른 것을 실천하며 사는 것, 실천하려는 노력을 가리킨다. '신(信), 경(敬) · 성(誠)'이란 옳은 것을 선택하고 자기화 시키고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자세를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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