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아나운서랑 사귄 적이 있어요."
소개팅에 나온 남자는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회상에 젖은 듯한 눈빛.
여자는 소개팅에서 만나자 마자 그런 이야기를 써내는 사람이 영 마뜩잖고, 속으로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되뇌었다. 하지만, 초면인 남자에게 차마 그렇게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애써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 그러셨구나... 인기가 많으셨나봐요."
"그때는 그랬죠."
그러면서 남자는 별로 궁금하지 않은 아나운서와의 연애담을 장황하게 풀어놓기 시작했다. 크게 알고 싶지 않은 세세한 것까지. 여자는 속으로 살짝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지가 뭐야. 자기 자랑을 하고 싶은건지. 앞에 앉아있는 당신은 내 성에 안 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그동안 숱한 소개팅을 했지만. 이런 적은 또 처음이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밀려오는 짜증은 어쩔수 없었다. 한참을 듣던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년이 지난 지금도 그 남자가 여전히 선, 소개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최근 들었다. 아마도 그는 그 아나운서를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인지, 과거의 자신을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인지 알수 없다.
그런데 주위를 보면 과거에 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내가 왕년에...'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말하는 사람. 그리고 '내가 왕년에 누구를 만났었는데...'라면서 자기 과시를 하거나, 은근히 주변 사람들을 무시하는 듯한 이들도 있다.
남녀를 불문하고 재력가, 유명인을 만난 것을 무용담처럼 늘어놓는 이들은 종종 있다. 그리고 꼭 거기에 자신이 그를 힘들게 해서 헤어졌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지곤 한다.
누구나 지나쳐보면 아쉬운 연애는 많다. 자신에게 순정을 다하던 첫사랑을 알아보지 못하고 놓친 일, 아슬아슬하고 풋풋했지만 용기가 없어서 놓친 상대,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놓친 상대...
그런데 언제나 과거에 잡혀 사는 사람들을 보며 자신을 들여보게 된다. 혹시 저렇게 과거에 잡혀 산적이 없었나. 누군가를 '놓쳤다'는 표현은 쓰고 싶지 않다. 그때 당시에는 '현실'에 충실해서 했던 선택들이므로. 지나간 과거는 늘 아름답게 포장되곤 하지만, 당시로 돌아가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다시한번 다짐해본다. 과거의 영화나 미래의 걱정에 살지 않고, 현재 '지금 이순간'을 살 수 있기를. 오늘도 미래에서 보면 다시 돌아오지 못 할 과거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