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Lady Bird(2018)
자라나기 위해서 많은 것들과 싸워야 했다. 어릴 때는 내 작은 세계 안에서 싸울 수 있는 대상과는 다 싸워보았다. 엄마, 아빠, 동생, 친구, 선생님, 벌레, 강아지 같은 존재들이 있었다. 조금 더 커서는 세상을 가득 채운 비극과 부조리에 맞서야겠다고 생각했다. 쉽지 않았다. 비극과 부조리에는 명확한 실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에는 조금은 겁이 많고 어리석은 내 자신을 이겨보려고 애를 썼다. 스스로와 마음속에서 티격태격 다투는 와중에, 숫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월세, 학비, 병원비 같은 것들이 – 어릴 적 회초리로 쓰던 효자손이나(참 모순적이다) 늦은 밤 골목길을 혼자 걷는 것만큼이나 무서울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부터 나는 더 자라고 싶지 않아졌다.
자신의 이름을 “LADY BIRD”라고 지은 열일곱 소녀 크리스틴은 자신을 둘러싼 작은 세계와 싸우는 중이다. 레이디버드는-그녀가 더 좋아하는 이름은 레이디버드이니 이렇게 부르자- 지긋지긋한 동네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의 대학에 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레이디버드의 집에는 돈이 없고, 그녀는 성적도 그리 좋지 않다. 정신 차리라는 엄마와 말다툼을 하다가 성이 난 레이디버드는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다음 장면에서 핑크색 기브스를 하고 등장한다.
레이디버드는 정말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성교육 강사의 고리타분한 말이 듣기 싫었는지, ‘보기에 추하다고 꼭 부도덕한 건 아니잖아요.’라고 크게 말하며, 첫 섹스를 특별한 순간으로 간직하기 위해 여성 상위 체위를 하고 난 뒤 상대방에게 ‘우리는 서로의 순결의 꽃을 딴 거야.’라고 말하며 기뻐한다. 레이디 버드라고 스스로에게 지어준 이름은 그녀에게 세상과 맞설 수 있는 힘을 준다.
그러나 세상과 싸우는 게 만만치는 않다. 아빠의 실직 뒤 어려워진 집안 형편은 숨기고만 싶다. 엄마와의 갈등은 하루가 다르게 심해진다. 관심 있는 남자의 친한 무리에 끼려고 하다가 단짝친구와는 말도 안 하는 사이가 된다. 어딘가 특이한 아이로 보였던 레이디 버드가 겪는 갈등은 전혀 특이하거나 낯설지 않다. 우리가 자라나기 위해 싸워야 했던 것들이 레이디 버드의 앞에도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싸움의 끝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는 모르겠다. 맞서 싸워야만 했던 것들이, 사실은 나를 가장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청소년기는 막을 내린다. 레이디 버드의 싸움도 그렇게 끝났다. 좋아했던 남자애는 영 별로고, 기껏 애써서 간 뉴욕의 대학은 삭막하고 외로운 곳이었다. 레이디 버드의 마음이 돌아갈 수 있는 곳은 그렇게도 지긋지긋해했던 새크라멘토의 가족들과 친구들이었다. 그리고 레이디 버드가 정말로 사랑하고 원하던 것은 화려한 뉴욕이 아니라 투박하지만 정겨운 자신의 고향 새크라멘토였다. 그것을 깨달은 레이디 버드는 신입생 파티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름을 물어보자 레이디 버드가 아니라 크리스틴이라고 답한다.
스스로에게 이름을 지어주던 시절. 세상에 맞서 나만의 세계를 쌓아올리던 시절. 그 시절의 다른 이름은 ‘레이디 버드’이다. 처음에는 그저 ‘엉뚱한 주인공’ 정도로 생각했던 크리스틴은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열일곱 살의 나 자신을 보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어딘가 어색하고 한편으로는 늘 화가 나있던 그 시절의 자신을 스크린 위에 소환해 다시 만나는 것, 보듬어 주는 것, ‘레이디 버드’라는 예쁜 이름으로 기억해주는 것. 그것이 감독과 우리가 늘 바라왔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