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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순간기록자 Feb 14. 2019

시작은 마봉춘이었다

재미 삼아 냈던 이력서 한 장에 내 삼십 대를 헌납했다

잉여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나는 주 1~2회씩 8개의 과외를 하며 월 500만 원에 가까운 수입을 올리던, 명문대 출신 잘 나가는 과외선생이었다.

장래희망이나 직업을 과외선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어디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은, 직전까지 각종 국가고시, 자격시험을 준비하느라 피 끓는 20대를 허송했으나, 마땅한 결과를 얻지 못해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예비 재수생이었다.

다시 시험을 준비하려던 나와 달리, 이미 직장 경험이 있던 절친 M양은 같이 하던 공부를 접고 채용공고에 응하기로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만 남겨질까 불안해하던 어느 날,

그녀가 “야 이거 어때?”라면서 찾아 보여준 것은 M방송국에서 내놓은 방송기자 공채 공고였다.

‘뚱뚜둥뚱뚜! 만나면 좋은 친구 우우우...’

M양은 “넌 말을 잘하니까 기자 해도 어울릴 것 같아”라면서 원서를 내어보는 게 어떨지 제안했다.

꿈꿔 본 적은 없지만 흥미로운 직업이 아닌가.

그러나 되받았다.

“야, 말 잘하면 다 기자 하냐. 말 잘하니까 변호사 하면 되겠다는 말에 혹해서 내다 버린 게 3년이 넘는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사실 이미 늦었다. M의 말을 듣고 찾아본 공고는 그날 접수가 마감될 예정이었고, 그나마 5시간도 안 남았을 때였다.

5시간 투자해서 뭐라도 된다면, 밑져야 본전 아닌가.

이렇다 할 구직경험도 없고, 변변한 경력도 없으니 이력서라는 걸 처음 내보게 생겼다.

당시(2011년 11월) 가장 핫했던 무한도전으로 말도 안 되는  사행시를 쓰고 내 열정을 피력했다.

사법시험, 의학전문대학원을 준비하는 동안 따놓은 영어 성적을 입력하고, 아무렇게나 휘갈겨 이력서를 완성했다.

첫 이력서다.

무사히 접수가 됐는지 세 번도 더 확인했다.

잘 기억나진 않지만 내 접수번호는 1800번대였다. 내가 거의 마지막 지원자겠구나 싶으면서도, 1800명이나 응시하는 시험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 이력서 접수와 동시에 내 멘탈은 탈락 확신이라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팔자에 없던 기자가 된 건, 아무래도 그 날 M양의 연락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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