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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갓 Feb 28. 2021

비에 대하여

 오랜만에 시덥지 않은 글을 다시 끄적여본다. 사실, 요즘은 일기도 잘 챙겨 쓰지 않고 있다. 짧게는 2, 3일, 더 길어지면 1, 2주 치 일기를 요약해서 쓰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이렇게 다시 글을 쓰기로 생각한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단 한 번도 '비' 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그래서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두 번인지 헷갈리지만) 썼다. 그리고 비 또한 그만큼 좋아한다(우위를 가리기 힘들 만큼). 내리는 비를 가만히 보는 것도 좋아하고, 비를 맞는 것도 좋아한다. 나는 그동안 왜 비에 대한 이야기를 쓰지 않았던 걸까?

 나에게 비는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학생 때는 비가 내리던 내 생일에 혼자 집 근처 바닷가를 걷고, 거기에 있는 산에 올라가기도 했다. 더 크고 나서는 비가 내리던 날 인연이 시작되고, 비가 내리던 날 인연이 끝나기도 했다. 비는 나에게 있어서 시작이기도 했고, 끝이기도 한 셈이다.

 물론,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 끝이 있어야 새로운 시작이 있다. 나도 그 간단하고도 명확한 이치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 시작과 끝이 너무나 크게 다가온 적이 있다. 그리고 나는 시작과 끝이 두려워졌다. 단지, 끝이 두려워 시작을 하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시작과 끝, 모두가 두려워졌을 뿐이다. 더 많은 행복을 얻고, 그 이후에 큰 슬픔을 겪는 것보다 그냥 무미건조한 행복과 큰 고통 없는 잔잔한 일상의 슬픔이 더 낫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 말은 누군가에게는 참 희망적인 문구가 될 것이다. 적절한 동기부여를 해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문장 그 자체로 해석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일도 없고, 슬플 일도 없이, 그냥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이 말은 때로는 형체가 없는 누군가와 하는 약속처럼 느껴진다.

 나는 여전히 비를 좋아한다. 빗방울이 나뭇잎과 나뭇가지에 툭툭 떨어지는 소리도 좋고, 비 내리는 날의 냄새도 좋다. 비를 맞았을 때의 그 찝찝함도 좋아한다. 그냥 비 내리는 풍경, 그 속에 담긴 분위기 전체를 좋아한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는 그 어떤 이유도 조건도 없다. 나는 그저 비가 내리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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