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리 Jan 21. 2019

여자 주재원 잘할 수 있을까?

불신을 의심으로, 의심을 확신으로

작년 하반기 주재원 선발이 확정되고 나서 지금까지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주재원에게 요구되는 역량 교육과 언어 교육을 이수해야만 했고, 해외로 나가기 전 친구들과 이별 인사, 가족들과의 시간을 보내며 신변 정리를 했습니다. 교육을 받으면서 나름 재미나고 신선한 경험을 하였는데, 그것은 차후에 따로 글로 남기고자 합니다. 지금은 해외로 나온 지 딱 2주가 되어 갑니다. 환경, 날씨, 오피스, 사람들, 언어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합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런 낯선 것들을 마주하다 보니 계속 긴장하고 있나 봅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한국에서 퇴근하고 돌아온 날보다 몇 배의 피곤함을 느낍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마주하게 되는 햇살, 출근하는 길, 오피스의 사람들, 새로운 업무, 새롭게 마주치는 사람들, 소통해야 하는 언어들 하나하나까지 신경을 써서 정성스럽게 느끼고 배워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주는 지명을 익히느라, 새로운 오피스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인사하느라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어디 가야지 입에 맞는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쇼핑몰은 어디가 좋은 지, 세탁소, 주요소, 세차 등 생활 정보를 쏟아내는 선배 주재원들의 말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메모하고 지도 앱에 저장하느라 평소보다 몇 배 스마트 폰을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새로 받은 스마트 폰도 필요한 앱을 설치하고 활성화시키느라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선배 주재원들은 익히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분들이셨지만, 그래도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잘 대해주고 싶은 마음이 따뜻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사석에서는 '첫 번째 여자 판매 주재원'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주재 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마무리하여 여자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면 좋겠다는 말씀도 해주시는 등 기대 이상으로 환영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저를 응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아 낯선 환경이어서 조금 얼어 있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재원으로서 해야 되는 역할에 대해 걱정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잦은 출장과 의전으로 체력 소모가 많은데 안정적인 건강 관리를 잘해나가야 되며, 무엇보다 해외 생활에서의 '안전'을 강조하셨습니다. 주재원에게 지원되는 차량을 운전하는 것에 있어서도 한국과는 다른 도로 환경, 체계 그리고 오른쪽에 핸들이 있어 한국과는 방향이 반대라서 익숙하지 않은 점 등이 실질적으로 제가 첫 번째로 겪은 난관이었습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으므로, 선배 주재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며칠 간은 차를 얻어 타고 다녔습니다. 우선적으로 출퇴근 길을 외우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디서 유턴을 해야 하는지, 어느 차선으로 옮겨타야 하는지, 어디에서 빠져나와야 하는지, 톨비는 어떻게 지불하는지 꼼꼼하게 머릿속에 각인시키고 나서 혼자 연습을 했습니다. '낯선 것이 있다면, 시간과 연습을 통해 익숙하게 하면 될 일입니다.' 조급해한다고 건너뛰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운전이 익숙해지자 '자신감'이 더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로 혼자 유명한 스폿까지 가보고 둘러보고 하며, 주말을 즐기기도 하면서 낯선 환경을 조금씩 익숙한 환경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또 다른 난관은 파트너사와의 미팅이었습니다. 전임자가 일찍 귀임하는 바람에, 충분히 업무 인수인계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업무를 바로 착수해야 하는데, 문제는 전임자가 이미 잡아놓은 파트너사와의 사업계획 협의 미팅을 바로 주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파트너사와의 미팅은 많이 해봤으므로, 같은 맥락으로 진행하면 되겠지 했는데, 주재원으로서의 미팅은 차원이 다른 것임을 느끼게 해 준 첫 미팅이었습니다. 첨예한 이견이 갈리는 상황을 어떻게 조율하면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고, 스스로 시장과 현안을 깊숙이 이해하고 있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미팅을 리드해 나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는 본사에 있을 때처럼 우리가 제시한 사업계획에 대해 동의해 달라고 푸시했고, 파트너사 대표는 격앙된 어조로 사업계획에 동의를 원하면 정확한 가격, 상품 정보를 완벽하게 미리 내놔봐라라고 하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더불어 우리 경영의 히스토리, 시장 환경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서 무슨 대화를 하자고 불렀느냐면서 미숙한 준비상태인 저를 호되게 꾸짖기도 했습니다. 항상 회의를 주도하는 것에 자신감이 있었던 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모두 맞는 말이라고 생각되어 진심 어리게 사과했습니다. 내가 잘못한 것에 대해 사과하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요. 그렇게 미팅은 양사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이 났고 비지땀을 흘려야 했지만, 현장이란 이런 것이구나.라는 것을 빨리 배운 것 같아 보람차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미팅 결과를 간략히 정리하여 파트너사 대표에게 메일로 보냈고, 상사에게도 첫 번째 미팅이라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재미팅을 통해 사업계획 협의를 완료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상사는 짧은 시간 그래도 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을 보니, 비록 회의가 우리가 원하는 결론을 내진 못했지만 비즈니스라는 것이 현장에서는 항상 이렇게 이견이 있고 그것을 좁혀가는 과정이 있는 것이라고. 첫 번째 치고 잘했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솔직히 여자 주재원 잘할 수 있을까?라는 '불신'이 있었고, 선발이 확정되었을 때는 평가자들이 그럴만한 사람이니까 뽑았겠지, 하지만 진짜 현장에서 될까? 하는 희미한 '의심'으로 그리고 오늘 이렇게 첫 미팅을 하는 것을 보니 잘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든다고. 자신감을 가지고 하라고. 


 

잘한다는 것은 매우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어쨌든 경험이 많은 상사로부터 가능성을 인정받은 것 같아, 그 과정을 좋게 평가해주신 것 같아 다행스러웠습니다. 조급해하지 않고 하나씩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재 생활이 시작되었고, 늘 그렇듯 첫 경험은 엉망이었지만 그 경험이 나중에 발전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알기에 오히려 입가에 미소가 생기는 그런 2주였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