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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경 Mar 05. 2019

아보카도의 조용한 달리기

그에게 배우는 성실함에 대하여

집에 못 보던 아보카도가 다섯 개 놓여있었다. 같이 살고 있는 여동생이 퇴근길에 사 온 모양이었다. 동생은 아보카도를 좋아해서 2주일에 한 번 꼴로 과일 가게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아보카도를 사 왔다. 동생은 우리의 공용 공간인 작은 부엌 언저리에 아보카도를 올려두었다. 냉장고에 넣지 않을 걸 보니 언제나 그랬듯 실온에서 며칠간 익히려는 것이었다. 화장실에 갈 때마다 부엌을 지나야 하는 우리 집 구조 때문에, 본의 아니게 난 3박 4일간의 아보카도 관찰자가 되었다.

아보카도, 그가 우리 집에 온 첫날, 비자림 숲을 닮은 싱그러운 초록 껍질이 ‘난 절대 안 익었어요. 만질 필요 없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손을 댈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내 집에서 첫날밤을 머물렀다. 조금 편안해졌는지 둘째 날엔 살짝 물렁했고 껍질은 흑녹색을 띄었다. 셋째 날 우리는 각자의 하루를 소화한 뒤늦은 새벽에 마주쳤다. 잠결에 화장실을 가다가 ‘오늘은 얼마나 익었을까?’하는 마음에 집게손가락으로 아보카도를 꾸-욱 눌러봤다. 그는 어제보다 2mm 정도 유연해졌다. 넷째 날 아침에는 그의 외모도 궁금해졌다. 하얀 비닐봉지 입구를 펼쳤더니 마침내 그는 고동색으로 변해 있었다. 물렁함의 정도가 당장 먹기에 완벽했다. 동생은 잘 익은 아보카도를 냉장고 신선칸에 넣었다. 그는 이제 바삭하게 구워진 통밀 식빵 위에 앉아 우리 자매에게 즐거움을 줄 것이다.

방으로 들어와 완전하게 익은 아보카도를 생각했다. 속도는 느리지만 매일 조금씩 익어간 그의 성실함을 생각했다. 여동생의 미니 오븐 위에 앉아 24시간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과육의 가장 완벽한 무르익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도 그는 나태함을 접어두고 착실하게 움직였다. 보드랍고 단단한 씨앗을 꽈-악 움켜쥔 채로. 좋은 지방과 단백질을, 부드러운 식감과 버터의 풍미를 우리 자매에게 선물해주겠지. 그러고는 제 임무를 다했다며 자기 생 후련하게 떠나가겠지.

내 안에 있던 글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면서 꽤 잘 쓰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둥둥 떠다니는 생각을 잡아 의미 단위의 문단으로 정리하고, 정리한 생각을 자음과 모음의 만남으로 단정하게 담아내고 싶은 욕심. 글을 꾸준히 쓰고 있는 친구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끌리는 책을 사 읽고, 사람들과 모여 필사하고, 글쓰기 책들을 수험생의 자세로 공부했다. 글쓰기 책에서 자극을 주는 문장에는 밑줄을 긋고, 새로 알게 된 것을 글쓰기에 적용했다. 도움이 되는 팁이 여럿 있었는데, 결국에는 글을 매일 써야 한다는 공통된 의견으로 수렴되었다.

가스안전 검진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방문처럼, 예고 없이 찾아오는 영감을 반갑게 맞이하는 일. 부지런히 적어 놓은 메모 조각에 인내심을 더해 한 편의 글로 만들어내는 일. 딱 먹기 좋게 익어가는 아보카도처럼 딱 읽기 좋게 익어가는 글쓰기를 위해, 나는 매일 앉은자리에서 느리게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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