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wpw Feb 25. 2020

왜곡된 욕망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기분이 무척 안좋았다. 왜 내게 굳이 불륜에 대해 이야기 한 건지, 그리고 그 대상이 회사 동료인지. 문제는, 나도 그 회사 동료 중 하나였고 당사자들은, 그런건 이미 거리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룻밤의 뜨거운 연정, 금단의 배덕감이 주는 즐거움은 아주 오래된 것이다. 인류사에 언제고 없었을 리가 있으랴. 그러니 도덕심이나 윤리의식으로 이야기를 해 보려 해도, 간통죄가 폐지된 마당에 쓸 말은 더더욱 없다. 나는 그저, 분명하게 잘못된 것을 이해하면서도 어쩐지 이것이 옳지 않아서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당사자들의 '배우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었고, 이 로맨스는 그저 남의 불륜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이런, 남에게 숨기기 급급한 일을 나에게 이야기 하는 일에 대해 '얕잡아 보인건가'하는 생각을 했다. 대체 누가 당당하게, 배우자가 있지만 오늘은 저 사람과 외박을 할 거라고 말한단 말인가. 그걸 좋다고 박수칠 사람은 또 얼마나 있을까. 하물며, 내가 그런 일에 박수 칠 사람으로 보였던건가 싶은 마음에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러나 으레 사회생활이 그렇듯이, 부하에게 얕잡아 보이거나 후임, 후배에게 얕잡아 보였다고 해서 되는대로 화를 내는 것은 상수가 아니다. 나는 다만, 적당한 침묵과 적은 단어로 그 복잡한 상황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걸로 만족했다.


집에 오는 내내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평일에는 만 보를 채우기 위해 버스에서 세 정거장쯤 일찍 내린다. 야경이 썩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것이, 뭔가 마음이 많이 상했다고 느꼈다. 찬 바람, 좋아하는 음악, 불빛어린 밤길을 걷는 일로도 풀리지 않는 기분이란 퍽 드문 일인데. 그러나 집에 오는 내내, 나는 기분 나쁜 이유를 다른 곳에서 찾고 있었다.


원래는 새벽 일찍 다니는 체육관을 부랴부랴 퇴근 후에 사람이 가장 많을 시간에 갔다. 온갖 체형의 남녀가 땀을 비오듯 흘리며 운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체육관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같았고, 그러거나말거나 오늘의 운동을 하면 그만이었다. 이를 악물어가며 운동을 마무리하고, 마지막으로 유산소 운동을 조금 할 참이었다. 레깅스를 입고 운동따윈 필요없을 것 같은 여성 몇과, 마찬가지로 근육이 탄탄하고 매끈한 남성 몇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온 몸이 땀으로 절고 잔뜩 쓴 근육들이 바르르 떨렸으나, 사이클에 앉아있는 내 모습이 유독 볼품없게 느껴졌다.


하루이틀일이냐, 하는 생각으로 계획한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쇠질의 좋은 점은 몸짱이 아니어도 기분은 좋아진다는 것이다. 사람은 동물이랑 대체 뭐가 다른걸까. 아까의 기분나쁜 감정도 꽤 차분하게 내려가 있었고, 일과를 잘 마무리 했다는 보람과 아직 열기가 올라오는 몸의 뻐근함이 무척 기뻤다. 이제 집에 가서 짬을 내어 게임 한 판 하고, 딱 한시간 정도 공부만 하고 자면 더할 나위 없는 하루가 될 것이었다.


운이 좋았다. 집에 와서 큐를 돌린 솔로랭크에서 나는 초반 내내 플레이를 잘 하지 못해 게임이 크게 기울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무도 욕하지 않았고, 그저 묵묵히 게임을 풀어나가려 노력했다. 패색이 짙었던 게임이 15분, 20분이 지나면서 놀랍게도 승기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초반 10분의 분위기완 다르게 30분도 되지 않아 승리를 받아내었다. 무척 드문 일인데 하면서 뿌듯했다. 아주 효율적으로 놀았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마지막으로 강의를 들었다. 프로세스 구조에 이어 컨텍스트 스위칭에 대해 공부하며, 아 이거 진짜 이해하기 짜증나는 부분이었는데 이제는 좀 머리에 들어오는 느낌이네 하며 기분좋게 내용을 정리해갔다. 공부를 끝내니 딱 11시가 조금 넘었다. 하루가 아주 만족스럽게 완성되어가고 있었고, 나는 비로소 내가 왜 그렇게 기분 상했는지와 마주할 여유가 생겼다.


나는 인정욕구에 크게 목마른 사람은 아니'었었다'. 소신대로 지내면 괜찮은 거지, 하고 생각했던 긴 시간동안 사실은 어떻게든 버티는 것이었고, 그래서 그게 무너진 뒤로 크게 고생을 했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내가 남들보다 훨씬 더 욕심이 많고 인정욕구로 넘친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 말인 즉슨, 나는 일에서의 성과나 가정에서의 인정, 친구들과의 인간관계 만큼이나 이성에게 어떤식으로든 인기가 있고 싶다는 뜻도 있었다.


이런 마음가짐은 보통 스물 언저리에 오는 게 아닐까 싶은데, 서른이 넘어서 사춘기 청소년을 갓 벗어난 수컷마냥 이런다는 것이 꽤 우스웠고, 그래서 나름의 타협점을 찾곤 했다. 이를테면, 여자랑 친구사이로 지내지 않는다거나 들어오는 소개팅을 거절하지 않는다거나. 노력하지 않고서 누가 간단히 반해줄만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여자랑 친구로 지낸다거나 하는 사치를 즐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오늘의 불륜에 내가 기분나빴던 것은, 사실은 내가 불륜의 대상이 아니었다는게 가장 컸구나, 싶은 것이었다. 누군가 그랬다, 자신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보지 말라고. 문득, 나는 성적인 대상이 아닌 것을 못 견디고 있는건가 싶은 것이었다. 외로움? 쓸쓸함? 그런 것과는 분명하게 달랐다. 작년부터 이어진 수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그런 씁쓸말랑한 감정들과는 무척 멀어졌었고,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는 것과 편안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일이 당연했었으니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성적인 대상으로 알아봐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러니, 여자랑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소리를 어금니에 꽉 깨물고 다녔던게다.


온전한 자신으로, 성적이기만 한 대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누군가를 도구로 생각하지 않아야 하니까. 그것이 존중의 첫 걸음이니까. 그러나 요새는, 인간이 인간다운 순간과 인간은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순간들을 함께 느끼며 그 사이 어딘가가 밤낮이 바뀌듯 바뀌는게 인간인가 싶은 것이었다. 요령좋게, 제도권내에서 이걸 잘 타협하고 조정하는 사람들이 표준적이고 평균적인 삶을 보여주지만 나의 뒤틀린 욕망은 동물로서 나에게 이끌리는 다른 개체들을 바라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었다. 다른 수컷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어떤 암컷이 찾는 수컷이 되는 '입장'으로. 윤리나 도덕심이 닿지 않는 습하고 그늘진 땅에서 기분이 상한 셈이다.


누군가에게 섹시하게 느껴지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다시 느껴질 수 있을지 솔직히 잘 모른다. 이렇다고 해서 내 일상이 크게 바뀌는 것은 없다. 똑같이 회사를 가고,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놀고, 사람을 만나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해 '깐깐하게'굴겠지만. 마음의 여유를 찾고 나니 명백히 알 수 있는 하나의 욕망을 오늘 또 배운다. 아주 원초적인, 태어나 자라며 가득 쌓은 것들이 아닌 그저 욕망 그 자체로 욕망의 대상이 되고자 하는 갈망을. 차라리 다행이다. 나는 누군가가 갈망하길 바라는 것이지, 금단의 배덕감과 굶주린 성욕의 아쉬움에 기분이 상한 것이 아니라. 아닌가? 이게 더 문제인가? 이건 과연 채워지는 욕구인가? 지금은 잘 모르겠다. 어느 날 누군가의 욕망을 받으면서도 갈증이 날 지, 그 때가 되면 더욱 명확해 지겠지.




작가의 이전글 기생충의 아이러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