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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wpw May 19. 2020

나는 인격을 파는 것이 아니오

인격을 사고 싶은 사람들에게

얼마 전 한 경비노동자분의 안타까운 죽음을 접하고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다. 경비노동자 뿐만 아니라 감정노동이 필요한 모든 자리에서 비슷한 비극이 반복된다. 사람들은 이슈가 되는 일에 정의롭게 분노하지만 정작 주변에서는 이런 일이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하지만 정작 경비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법적으로 경비업무외의 업무를 지시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자 수천개의 좋아요가 달린 댓글에서는 '그럴거면 경비를 뭐하러 쓰냐'는 내용이 있었다.


경비노동자로서 일 년 가까이 지내본 적이 있다. 당시 싯가 십억이 넘는 아파트 단지였다. 주차장에는 외제차가 즐비했고, 경비원들은 모두 20대 30대 남성들이었다. 아침이면 문을 열고 나가는 입주민들에게 90도로 인사했고, 들어오는 분들의 외부 출입문과 차량 차단봉을 열어드리는게 대부분의 일이었다.  중간중간 아파트 동과 지하 주차장을 순찰했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우편과 택배를 정리해서 세대별로 전달해 드리곤 했다. 그 외에도 주차관리나 층간소음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고, 낙엽을 쓸고 제설을 하고, 시설물의 훼손을 체크하기도 했다. 항시 한 명은 CCTV를 지켜봐야 했으며, 입주민이 아닌 사람이 출입하는 지 바짝 신경써야 했다. 수백가구가 사는 단지의 세대원이나 방문객을 모두 기억할 수가 없다보니 간혹 모르는 사람이 아파트에 들어오면 우린 '뚫렸다'며 혼나곤 했다. 


이렇듯 경비노동자의 업무란, 실상 법에서 정한 감시와 범죄예방의 효과 외에 훨씬 많은 일들을 하는 일종의 공동주거 관리인에 가깝다. 애시당초 주차관리인, 우편물/택배 수불 관리인, 환경/미화관리인 등 다 따로 두어야 하는 업무를 싼 가격에 후려치기 위해 경비에게 대부분 떠넘기는 셈이다. 그나마도 내가 있던 단지는 부유한 곳이라 분리수거나 폐품을 신경쓸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어떤 곳은 쓰레기 정리나 마트 심부름까지 맡긴다고 한다.


이런 과도한 노동의 전가도 문제지만 더 심한 문제는 이 일들의 이면에 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걸로는 모자라서 공손한 자세가 아니라며 화내는 사람, 차량 차단기를 1초만 늦게 열어도 욕을 하며 뭐하는 새끼들이냐고 윽박지르는 사람, 몇 번이나 택배를 전달하려 해도 받지 않다가 왜 이제까지 택배를 안 주냐고 도둑놈들이라고 소리치는 사람, 자신을 알아보고 미리 출입문을 뛰어나와 열어주지 않았다고 가슴팍에 손가락질을 하는 사람, 젊은 놈들이 벌써부터 '이런'일이나 하고 있냐는 사람, 주차문제나 소음문제로 안내전화를 돌리면 '감히'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냐는 사람.. 대부분의 친절한 입주민들 사이에 있는 이런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지위를 이용했다. 그래서 우리는 경비원이 아니라 아무 일이나 마음껏 시킬 수 있는 하인이었다. 입주민을 주인님처럼 섬기는 것이, 경비노동자의 가장 정확한 위치였다. 집 지키는 개와 우리의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떠올린다.


그나마 나는 잠깐 학비를 벌기 위해 왔고, 이 일을 계속 할 건 아니라고 생각해서 비교적 괜찮았다. 그러나 장년층은 다르다. 부모님과 편의점을 하며 깨닫는 것은 이 사회에 장년층을 위한 일자리가 몹시 부족하다는 것이다. 참혹한 현실 앞에서 '갑질'은 저항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쉽게 자를 수 있고,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팔아야 하는 것은 삶 그 자체였다. 인간으로 대해달라는 모습 대신 고분고분한 하인이 되는 것이 곧 친절이고 서비스 정신이었다. 그 이면에는, 이런 일이나 하는 경비들이 뭐 하는게 있다고.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녹아든 것이다.


이런 비극을 막기위한 정책과 법률, 제도의 개선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괴롭힘을 방지하는 온갖 제도들 틈으로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폭력들이 여전히 많다는 것을 안다. 다만 경비노동자나 감정노동을 해야하는 취약계층의 일자리들이 좀 더 극단적인 폭력에 노출된다는 것이 차이일 뿐이다. 정책과 법 이전에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그 누구도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에 인격은 포함되지 않는 다는 것을 뼈저리게 새겨야 한다는 점이다. 돈으로 노동과 서비스는 살 수 있을 지언정 인간의 존엄을 살 수는 없다. 설령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래서는 안된다. 당장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갑질부터 하려는 사회속에서는 어떤 정책도 법도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타인의 인격을 감히 돈으로 사려하지 말자. 잘나가는 기업의 회장님이든, 수 억 연봉을 받는 사람이든, 공무원이든,  동네 음식점의 주인이든, 편의점 알바생이든, 아파트 단지의 경비, 미화노동자든 간에 그들이 돈에 파는 것은 적절한 재화와 노동일 뿐 인격이 아니다. 어디 감히 내가 누군지 아냐는 그 말 한마디가 모여 모두가 모두에게 갑질하는 사회를 만든다. 누군가에게 당한 갑질이 나보다 힘든 사람에게 보복으로 돌아간다. 그걸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오늘도 누군가를 죽이고 있다. 그러니 당신 앞의 사람이 얼마짜리 노동을 하든 간에, 우리는 사람의 존엄을 돈으로 짓밟고자 하는 원초적인 욕망과 결별해야 한다. 어딘가에서 일어난 갑질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만,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게든지 찾아오는 폭력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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