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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면지언니 Oct 26. 2023

포항거리예술축제, 길 위의 만찬

포항거리예술축제에서 길 위의 만찬을 기획했던 첫 시작은 뻔한 개막식 자리에 정치인들의 인삿말을 가득채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귀빈, VIP 자리를 따로 만들지 않고, 시민들과 예술가들이 같이 어울려 앉아 음식을 나눠 먹으며 축제의 시작을 함께 즐길 수 있을까.


2019년 첫 해에는 바닷가 해안도로에 차량 통행을 막고 송도 해변길을 따라 도로 위에 300명의 자리를 만들었다. 누구나 나눠 먹고 싶은 음식을 들고 자리할 수 있었고 축제에서 간단한 음료를 준비했다. 숲과 바다 사이, 자동차만 쌩쌩 달리던 거리에 생경하게 샹들리에가 걸렸다. 높은 무대 없이 진행된 첫 공연은 포항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터뷰해 더 튠이 만든 포항살이였다. 이어지는 공연은 온앤오프 무용단과 시민들이 벌이는 춤판이었다. 바닷마을의 일탈, 포틀럭 디너. 축제의 시작을 이런 자리로 열 수 있어서 참 행복했다.



2021년 전염병을 관통하고 다시 자리를 펼친 축제에서는 길 위의 만찬을 조금 다른 형태로 풀어냈다. 함께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없는 대신, 이웃과 나의 이야기가 여전히 서로를 마주하고 있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열 명의 이야기 중매자들을 모았고, 이 분들을 통해 포항에 살고 있는 다양한 분들의 이야기를 수집했다. 사랑했던, 기억하고자 하는, 그리고 함께 꿈꾸고 싶은 이야기들이 모였다. 테이블 위에 이야기를 올려두기로 한 백여명의 이웃들은 저마다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일곱살 어린이부터, 여든 살이 넘은 어른까지. 다양한 정체성, 출신지, 삶의 모습들이 테이블 옆 자리의 이웃이 되었다. 테이블 위에는 음식 대신 이분들의 이야기가 놓였다. 크고 작은 오브제들과 글귀들이 만나지 못한 만남들을 기억했고, 나의 지금을 두껍게 읽게 했다. 테이블에 가까이 가야 들리는 목소리들은 두런두런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조용한 숲의 공간에 스몄다. 전시의 이야기는 2022년에도 이어지며 숲의 공간을 낯선 미적 감각으로 채웠다.


마지막날 전시가 시작되기 전, 조용히 홀로 전시를 찾아온 참여자분이 계셨다. 휠체어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하실 거라고 이야기해주셨던 분. 테이블 위 이야기들을 한참 살피시고 고맙다고 이야기하셨던 분. 모두의 마음을 먹먹히 위로해주셨던 그 만남의 장면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정리해야지, 공유해야지, 마음만 먹고 멈춰있던 기억을 이제야 글로 옮긴다. 이야기를 만나고, 품어내고, 하나하나 정리하며 기록해준 동료들에게 이제야 고맙다는 인사를.


축제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함께 해준 분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반짝였다. 그 반짝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축제를 하는 이의 기쁨이 아닐까.



2022년

마치 보내지 못한 편지처럼, 그런데 잘 식지 않는 마음처럼 아직 뜨끈한 무언가가 남아 있어서, 이제야 축제에 대한 글을 남겨둔다. 살면서 숲의 구석구석을 이렇게 자세히 알았던 적이 없다. 포항거리예술축제와 함께 어느덧 다섯 해. 가장 좋은 일은 무엇보다 숲, 숲, 숲. 


숲을 잘 알게 되어 참 기쁘다. 어떤 시간의 숲이 고요한지, 어떤 시간의 숲이 아이들로 가득한지, 아침의 빛깔은 어떤 모양으로 떨어지는지, 어떤 길을 따라 가면 바다로 이어지는지 관객들이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상상하며 프로그램이 완성되었다.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거리의 공연들이 숲의 사이 사이를 부드럽게 채우는 그런 느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유난히 산책하는 공연이 많았고, 이것은 몇년전 생각했던 산책자들의 상상을 실현시켜주었다. 유난히 내밀한 이야기들이 많았고, 관객과 예술가들이 같이 눈물을 훔치기도, 같이 배꼽잡고 웃기도 했다. 숲 한 구석에서 벌어진 시민 배우들과의 춤판은 빼놓을 수 없는 보석이었고 말이지.


시선과 공간, 거리예술에 대해 시민들과 서유, 젤리장과 워크숍을 했던 시간이 제법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나만의 축제가 아니길 바랬던 마음이 거울에, 풍경에, 시간에 담겼다.


함께 걷는 길은 다른 풍경을 끌어온다. 각자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잠깐의 공동체가 된다. 이야기가 가득한 축제를 만들었더니 마음이 여전히 두근거린다.



2023년


포항거리예술축제에서 5년을 일했어요. 저의 역할은 프로그래머. 국내외 작품을 구성하고, 축제의 공간과 장소에서 각 프로그램들이 관객을 가장 잘 만날 수 있게 전략을 구성하고 현장의 계획을 짜는 일이었어요. 예술가, 지역의 이웃들, 스태프들과 소통했고 함께 축제를 만들었습니다.


축제를 만들고 싶다는, 거리예술을 확산시키고 싶다는 포항문화재단의 한 팀장님이 문래동 사무실에 찾아오셨고, 그렇게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작지만 알차게 꾸려낸 첫 축제에 많은 예술가, 시민들이 찾아주셨습니다. 


매년 역할도 책임도 조금씩 늘어갔어요. 숲과 바다를 이해하는 일도 즐거웠고, 다정한 이웃들이 늘어가는 것도 행복했습니다. 변하는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거리예술이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 이를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였습니다. 거리예술을 모르던 분들이 거리예술과 친해지는 것을 보는 것이 정말 벅찼어요. 대화 자리 만드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축제가 초청의 장을 넘어서서 함께 만드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교육, 워크숍, 공동창작과 제작지원의 비중을 조금씩 늘려갔어요.


숲이라는 공간은 참 무궁무진해서, 매년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해주었어요. 작년에는 예술가들과 함께 숲의 이모저모 공간을 탐색하며 포항이었기에 가능한 미장센들을 참 많이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삼백인의 시민들이 함께 해변길을 점령하며 식사를 했던 ‘길 위의 만찬’ 프로그램부터, 이게 가능할까 싶었던 신중년 공동착작 거리극 ‘조금씩 천천히 움직일께’까지. 시작할 때는 그려지지 않던 일들이 축제가 성장하며 가능해졌습니다. 여름 휴가 기간을 반납하고 함께 땀 흘렸던 시민 배우들이 축제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로서의 자신을 이야기하며 숲에서 자유로이 선언을 외쳤을 때는 소나무 기둥을 붙잡고 엉엉 울었어요.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아요. 불가능한 일들에서 멈추지 않고 끊임 없이 함께 달리며 방법을 찾아냈던 우리 팀, 거리예술이 주는 감격에 흠뻑 잠겨 함께 신났던 우리들, 포항이 낯설지 않게 품어주고 반겨준 이웃들, 사랑스럽고 멋지고 섹시한 할머니들, 전국에서 달려와준 예술가들과 동료들, 특공대처럼 현장의 해결사가 되어준 스태프들. 이 글을 마치고 차근차근 연락드릴게요. 누군지 아시죠 다들? 


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포항거리예술축제가 올해 멈추었기 때문입니다. (축제가 진행되지 않을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축제를 담당하는 업무가 조직도에서 없어졌고, 거리예술 예산이 전액 삭감되었다고 해요. 저도 담당자를 통해 이야기를 들었을 뿐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합니다. 함께 일했던 담당자도 저와 같은 마음일 거에요.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참 좋은 말인데요. 축제의 끝, 축제의 다음, 노동의 끝, 노동의 다음. 생태계와 함께 대화하고 서로 이해하며 발전적인 지속성, 새로운 일들의 모색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시작할 때 함께 궁리하고 치열하게 고민했던 것만큼 마무리도 치열하면 어떨까요. 바라는 것은 그저 얼굴 보고 나누는 대화.


역시, 축제는 졸업식이 없어서, (방학식인가요) 이 글로 셀프 졸업식을 (방학식을) 합니다. 제가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면 언제든 대화 나누어요. 저는 어딘가에서, 신나고 따뜻하고 다정하고 치열하고 진지하고 유쾌하고 다하는 그런 자리 만들기 위해 노력할게요. 다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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