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피존밀크 Jul 18. 2024

내가 만약 오뎅꼬치 세 개만 살 수 있다면





 어느 밤, 영화 ‘꿈의 제인’을 보았다. 해당 영화의 주인공 제인은 트랜스 여성이며, 여러 명의 가출 청소년들과 함께 살아가는 캐릭터다. 제인은 케이크를 앞에 두고 함께 사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은 4명인데 이렇게 케이크가 세 조각만 남으면 말이야,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그 대사와 함께 내 기억 속 저편에 있던 한 추억이 재생되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내 부모님은 가게를 운영하시느라 나와 동생을 돌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없으셨다. 하지만 학원을 늦게까지 보낼 돈의 여유는 가득했다. 그 은총으로 나와 내 동생은 밤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각종 학원을 매일매일 참 바쁘게도 다녔다. 그 때도 땅거미가 짙게 내린 저녁이었다. 학원 수업이 끝나고 출출하던 차에 같이 학원에 다니던 어린이 한 명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우리 엄마가 친구들이랑 오뎅 사 먹으라고 돈 줬어. 우리 같이 먹자!”



이 어린이는 재림예수인가, 어쩜 이렇게 감사할 수가 있나,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여러 아이들과 함께 분식 트럭으로 향했다. 날이 막 쌀쌀해지던 시점이어서 그런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오뎅은 정말 맛있어 보였다. 오뎅꼬치 하나를 잡고 입에 넣으려는 순간 그 어린이는 루시퍼의 얼굴을 하고 내 꼬치를 빼앗았다.      

 “미안한데 우리 엄마가 오뎅 세 개 살 돈만 줬어. 그래서 넌 못 먹어. 그냥 오뎅국물만 마셔.”

그 분식 트럭 앞에 서 있던 어린이는 나 포함 4명이었다. 어떤 기준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오뎅꼬치 파티원에서 제외되었다.



 지금의 나였으면 이 상황이 참 더럽고 치사해서 그 자리를 바로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뎅을 먹고 있는 어린이들 옆에 서서 묵묵히 국물을 마셨다. 그 와중에 건더기가 먹고 싶어서 무 한 토막도 종이컵에 야무지게 담았다.      


 어른이 되어 그 때의 어린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을 해봤다. 난 그저 그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었다. 비록 오뎅꼬치는 먹지 못했지만 무언가를 함께 나눠 먹을 수 있는 친구 사이로 인정받고 싶었다. 어른이 된 지금의 난 당시 함께 있었던 아이들의 이름도,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과 외로움만큼은 어제 있었던 일처럼 강렬하다.      

 


 난 가끔 이 대사를 곱씹어본다.

“사람은 4명인데 이렇게 케익이 3조각만 남으면 말이야, 그 누구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선 안 돼. 차라리 다 안 먹고 말지.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장이야.”

내가 만약 제인이었다면 혹은 내가 만약 그 아이였다면?

내가 제인이라면 케이크 세 조각을 열두 조각으로 만들어서 인당 네 입씩 먹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였다면 오뎅 대신 떡볶이 한 그릇을 사서 한 입씩 나눠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뎅국물을 대여섯 컵 마셨을 거다.     



 물론 어린이에게 이런 유연한 사고를 기대한다는 것은 참 어렵다. 하지만 이런 유연함을 어른이 되어서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차라리 다 같이 안 먹고 말지 아니, 차라리 내가 안 먹고 말지. 시시한 중년이 되고 싶지 않다.



그나저나 당시 그 어린이는 어떤 중년이 되었을까? 지금 내가 글로 적고 있는 이 에피소드를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어떤 어른이 되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누군가를 제외하기보단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법을 궁리할 수 있는 그런 어른으로 자랐길 바란다.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