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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준희 Apr 06. 2021

새벽 기도의 단상

쌓인 세월과 기도의 길이


    


부활절이 오기 전, 고난 주간 특별 새벽 기도회를 나갔다. 교회가 집에서 5분 거리라 별다른 고민도 치장도 없이 일어나자마자 곧장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정말 오랜만에 영혼이 깨어있는 새벽이었다. 이전에 비해 새벽에 눈 뜨는 것 자체가 힘들게 느껴지지는 않은 걸 보니 새삼 나이가 들긴 했나 보다 싶으면서, 그만큼 간절함의 크기가 커진 건지 믿음의 밀도가 더 커진 건지 여러모로 복합적이기에 싱숭생숭한 마음을 안고 예배당에 들어섰다.



     우리 교회는 특별 새벽기도회 때 여러 목사님들과 교수님들이 방문하셔서 말씀을 전하신 후 기도와 찬양을 한다. 예배의 형식적 절차가 끝났음을 알리는 축도 시간이 지나면 예배당 불이 차츰 꺼진 후 개인 기도 시간이 주어지는데, 나는 이 시간이 가장 평온하고 좋다. 그 시간이 새벽기도를 하러 가는 이유 중 제일 큰 줄기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겠다. 최근 코로나 때문에 수용 가능 인원이 줄어 안타깝기는 하지만 내 기도가 떨어진 좌석의 거리만큼 사적으로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 결론적으로는 더 좋게 와 닿았다. 앞선 글에 언급했던 말이고 차츰 실감하게 된 사실이지만, 나이 든다는 건 나보다 내 주위를 염려하게 되는 일임을 새벽기도에서 단편적으로 목격하고 왔다.  내 기도가 나부터 시작해 내 주위의 모든 사람, 인간과 동물의 공생 그리고 세계 평화의 염원으로 번지기까지 최선을 다해 기도를 아무리 늘이고 늘여도 나는 엄마만큼 기도를 오래 하지 못한다. 엄마는 나보다 무려 십 분이나 더 오래 기도하기 때문이다. 쌓인 세월 탓일까, 챙길 사람이 많아서일까. 뽀송뿐 아니라 그곳에 앉아 계시던 모든 엄마들이 그랬다.



     새벽기도를 드리며 두 번째로 목격한 건, 세상에 아픈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프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주장이 외려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질 만큼 주보나 교회 공지글, 기도 제목 등을 살피다 보면 한 분 걸러 한 분의 기도가 아픈 누군가를 위한 기도다. 개인 기도 시간이 주어지고 불이 하나 둘 꺼지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기도로 적막이 감도는 시간을 채워간다. 대부분의 엄마들이 목매여 오는 누군가의 이름으로 운을 떼기 시작해 끝날 즈음엔 쌕쌕 대듯 격정적인 울음을 토하며 염려 섞인 기도의 클라이맥스를 이어가다 끝을 맺는다. 뜨문 뜨문 들려오는 그들의 신음의 원인이 사랑하는 이들의 아픔 때문이라는 걸, 물리적으로는 멀지만 심리적으로는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거리에서 인지하게 되었다. 실은 나도 아빠 류가 아팠던 연유로 교회에 더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류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나 역시 신에게 매달려 징징댈 이유가 별로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신을 찾는 가장 큰 이유가 눈앞에 닥친 고난 때문임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나, 가끔은 그만큼 감사라는 제목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되어 슬프다. 그래서 감사의 대목은 언제나 사소한 것부터, 가까운 일상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셋째로 목격은 아니지만 이 기회로 알게된 사실은 새벽에 일어나는 기분이 그리 싫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때 깨어있고 싶고 깨어있을 때 잠들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모두 잠들어있는 새벽에 홀로 깨어있는 기분이 엉뚱하게도 좋아서 기도하러 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백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기도를 마친 후 6시 반에 집으로 돌아오면 여지없이 침대에 눕게 되는 걸 저항해낼 힘이 없어서다. 직장에 다니면서 새벽기도까지 하시는 분들을 보면 얼마나 힘드시기에 저렇게 충실하실까 생각하게 되어 아리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을 떠나 존경부터 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새벽 5시에 집 밖을 나서면 어둑한 길목에 핀 봄꽃들이 유독 빛난다. 누렇게 뜬 달은 멀끔한 하늘에 홀로 서서 새벽같이 일어난 이들의 길을 외롭지 않게 비춘다. 어쩌면 하루 시작의 고요를 채우는 자연의 모든 것과 누군가를 향한 애정 어린 기도들이 모여 어려운 이 세계를 따뜻하게 굴러가게 만드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사님은 볼품없던 씨앗도 제 계절을 따라 각자만의 시기에 반드시 꽃을 피운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에 각자의 시기에 활짝 필 결실의 씨앗들이 그들의 낮과 밤에 안온하게 자리잡기를 소망하며, 어느 새벽이든 눈을 뜨고 최선을 다해 깨어 있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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