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이사한 집에 와이파이를 아직 설치하지 않아 혼자 심심해하고 있던 중 몇 해 전 만들어둔 스포티파이 플레이리스트를 발견했다. 엄마가 쓰던 낡은 블루투스 스피커로 그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고 아주 오랜만에 책을 읽었다. 그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었을 즈음 읽다 만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Essays in Love" 라는 심심한 원제를 번역한 것 치고 굉장히 감각적이고 매력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며 책갈피가 끼워져 있는 페이지를 열었다. 내용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 결국 나는 첫 페이지를 펼쳐 읽기 시작했다.
가장 작고 사소한 감정들을 글로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가끔 글을 읽다 보면 내가 분명히 경험했음에도 경험했다는 것을 인지조차 못했던 감정들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런 문장들은 잊혀져 있던, 그러니까 저기 어딘가 처박혀 있던 기억들을 슬그머니 불러내곤 한다. 기억 뿐만 아니라 그 순간의 작은 감각들까지도. 이 책이 그랬다.
스물 셋, 차창 밖으로 내민 손바닥에 느껴지던 밤바람. 대도시의 전망대 위에서 내려다본 붉은 노을과 곧이어 내 눈앞에 펼쳐진 눈물 날 만큼 아름다웠던 야경. 여름밤 한강 돗자리 위에서 마신 와인 한 잔과 들려오던 버스커의 노랫소리. 몇 번을 다시 읽어도 전혀 읽히지 않던 몇 줄의 글과 그런 스스로가 한심해 떨군 고개.
스물 하나, 마스크 아래에서 차마 하지 못한 말들과 살짝 취한 채 전한 고백 한 마디. 도시의 불빛이 달빛을 가리던 강남역 한복판에서의 작별인사. 해결하지 못할 문제들을 두고 고민하며 지새운 수많은 밤들.
스물, 내 얼굴에서 열감이 올라오며 ‘아, 나 얼굴 빨개졌다.’ 하고 자각하던 느낌. 내 머리카락을 엉키게 하는, 그러나 산뜻하게 기분 좋은 봄바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에 신나서 바라 본 파란 하늘.
열 아홉, 내가 가장 사랑하던 코마바의 새벽 냄새. 약간 습하지만 그래도 기분 좋던 새벽 공기. 팔을 뻗으면 양쪽 벽에 닿을 것 같았던, 비좁은 기숙사 방 침대에 걸쳐앉아 소리내어 울던 순간들. 여름밤 내리던 빗방울이 창 밖으로 떨어지던 소리가 숨겨준 몇 차례의 한숨들.
열 일곱, 캠프파이어 앞에서 기타를 치던 아이와 내 첫사랑의 시작. 아본데일의 잔디밭에 누워 보던 새까만 밤하늘 속 쏟아질 듯 많던 별과 은하수. 버스를 타고 30분을 갔지만 만나지 못한 사람과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다 빨갛게 얼어버린 내 볼과 손.
책을 편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잊혀졌던 감각들이 몰아치고 있었다. 나는 나의 이 작은 모든 감각을 사랑했고 내 모든 사소한 감정을 사랑했다.
내가 죽도록 미워했던 나 자신과 끔찍하게 아끼던 나 자신에 대해 생각했고, 내가 꺼려하고 피했던 타인과 좋아했던 타인에 대해 생각했다. 문장들을 곱씹다 나는 이미 과거의 한 페이지가 되어버린 사람들을 생각했고 과거에 머무른 나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어째서 여전히 나를 싫어하는지, 그러나 나는 어째서 이렇게 나를 사랑하는지 생각했다. 나조차 완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나는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하는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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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실수는 사랑하게 될 운명을 어떤 주어진 사람을 사랑할 운명과 혼동한 것이다. 사랑이 아니라 클로이가 필연이라고 생각하는 오류였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우리의 사랑 이야기의 발단을 운명론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은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증명해준다 - 내가 클로이를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만나고 못 만나는 것은 결국 우연일 뿐이라고, 989.727분의 1의 확률일 뿐이라고 느끼게 되는 순간은 동시에 그녀와 함께하는 삶의 절대적 필연성을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즉 그녀에 대한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기도 할 것이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특정한 무언가를 향한 사랑은, 특정한 누군가를 향한 사랑은 운명이 아닌 우연이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는 우리는 항상 그것을 운명이라고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야 만다. 그 착각 자체가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혹은 사랑했다는 증거가 된다.
그리고 그 오류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그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다.
사랑에 빠진 우리는 항상 우리 사랑의 대상을 “the one”, 즉 유일한 것이라고 믿어버리지만 사실 그 역시 우리가 살면서 지나치는 수많은 우연 중 하나 - "one“ - 일 뿐이라는 것.
내가 사랑한 내 감정들과 감각도, 내가 사랑한 사람도, 결국 내가 지나쳐 온 시간들 속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것 뿐이다. 한 때는 내 전부처럼 느껴진 감정들이, 나에게는 운명이었던 순간들이,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건 내가 이 모든 것들을 진정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그저 어딘가에 잊혀져 있는 한 페이지로 남아있다는 건 결국 그 순간들을 사랑한 시간은 끝났다는 것이다.
운명은 우리를 사랑하게 하지만 우리 사랑의 대상이 되는 건 우연이다. 운명이 내게 준 수많은 우연 중에서 나는 내가 사랑할 것들을 선택했고 후회 없이 사랑했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내가 사랑한 사람들을, 내가 느낀 감정들과 감각들을, 나를 만든 경험들을, 이 모든 것을 사랑하면서도 미워했고,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면서도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내 스스로를 질책했고 타인을 원망했으나 그 나를 향했던 질책과 타인을 향했던 원망까지도 사랑했다. 부정적인 감정들과 힘들었던 순간들까지 온 힘을 다해 사랑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완전히 긍정적으로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운명이라고 믿었던 모든 것을 향한 미움과, 질책과, 원망까지도 사랑하고 있었다.
이해하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추상적인 이야기이기도 하고, 감정의 복잡하고 작은 부분들까지 글로 표현해 내기에 내 글솜씨가 한없이 부족하기도 하고, 나조차도 내 사랑을 완전히 정의내리기 힘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사랑한다고 표현한 이 모든 것들은 결국 나만 아는 경험이고 느낌이기 때문에 매우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아닌 이상 내 사랑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고, 내 사랑이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온전히 전해질 수는 없다.
“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매우 주관적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는 거죠.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할 때 그 의미는 다들 달라요.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국 나만 아는 무언가이고, 그 누구도 이를 완전히 알아줄 수는 없다. 그러니까, 내가 말하는 사랑과 당신이 말하는 사랑은 아마도 꽤 다른 것을 지칭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사랑을 말해주더라도 나는 그 의미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닿는 내 사랑은 불완전하다. 그러나 나에게 닿는 누군가의 사랑도 불완전하다.
결국 사랑은 언제나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