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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의 하녀인건가?

<그는 나의 하인인건가?>

A가 출근 준비를 한다. B는 간단한 아침식사와 함께 A의 영양제와 물을 따로 준비해둔다. 그리고 출근 직전 B는 A에게 꼭 직접 향수를 뿌려준다. A가 재채기를 한다. B는 저 멀리에 있는 티슈를 뽑아 A에게 전한다. 그리고 물 한 컵을 떠 온다. 비염이 심한 A를 위한 B의 배려다. B는 집먼지가 비염을 악화시키는 걸 알기 때문에 먼지 청소와 침구 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쓴다. 집에 청소기가 4대인 이유다. A가 등이 간지럽다고 하면 B는 어김없이 손을 빌려준다. B는 외출할 때면 혼자 저녁을 먹어야 하는 (요리를 싫어하는) A를 위해 1인 트레이에 반찬과 찌개를 세팅해두고, 과일을 깎아두고, 냉장고 문을 열자마자 바로 보이는 자리에 둔다.


B가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낸다. A는 바로 그 음료를 뺏어 든다. 그리고 뚜껑을 따서 컵에 따라 B의 자리에 놓는다. B는 결혼 후 캔 뚜껑, 병뚜껑을 따 본 적이 없다. A는 B가 더울까 봐, 추울까 봐, 건조할까 봐 공기의 상태를 자주 체크하고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 기관지가 약한 B를 위해 공기청정식물을 키우는 게 취미가 되었다. 커피와 디저트를 좋아하는 B를 위해 주기적으로 디저트를 사다 나른다. 주기에 따라 B가 어떤 걸 먹고 싶어 하는지 A는 귀신같이 알아낸다.





사람들에게 이런 A와 B에 대해 이야기하면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왕이야? 왕비야? 어떻게 하면 서로를 그렇게 위해줄 수 있어?!

하인이야? 하녀야? 상대방한테 굳이 그렇게까지 해줘야 돼?


두 번째처럼 반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는 꽤 불쾌하다. 어떻게 살아오고, 어떻게 생각하면 저런 관점으로 볼 수 있을까 의아하기도 하다. (참고로, 불쾌한 이유는 그런 생각 회로를 가진 사람과 나는 잘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그들에게 우리의 라이프 스타일과 가치관을 일장 연설하고 싶지 않다. 좋은 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우리 부부는 왕과 왕비로 보였을 것이고, 꼴사납게 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우리 부부는 하녀와 하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나는 남편을 왕으로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한다. 그렇다고 내가 하녀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남편도 나를 왕비라고 생각하고 존중하고 사랑한다.(그렇게 믿고 있다.) 그렇다고 그가 나의 하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내가 나를 하녀라고 생각하고, 그가 스스로를 하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부부의 관계 또한 온전치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인 것은 우리 부부 모두 자신의 배려를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상대의 배려를 감사해한다는 것이다. 우리 부부가 많이 하는 말은 “사랑해”라는 말 다음으로 “고마워”라는 말이다.


사실 우리 부부는 철저하게 분업화되어 있다. 본인의 장점과 단점,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상대의 그 부분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 집안일과 서로를 챙기는 일도 자신이 잘하는 것은 내가 집중적으로 하면 되고, 상대방이 잘하는 부분은 상대방이 집중적으로 하면 된다고 여긴다. 둘 다 사회생활을 오래 해서인지 이런 파악이 빠르고, 해결하는 방법도 조금 심플한 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태생적으로 남자가 힘이 훨씬 세고 체력이 좋기 때문에 더 힘든 일을 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에 감사하고, 그렇게 행하는 것에 감사한다.(나는 언행일치를 보이는 사람을 존경하는 편이다.) 사람은 필연적으로 자신이 더 많은 일을 한다고 착각한다고들 하지만, 나는 남편이 더 많은 부분을 배려해주고 있다고 생각하고 항상 고마워하고 있다. 가끔은 이런 과한 사랑을 받으며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기도 하다.




사설이 길었는데 나는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게 따로 있다. 사실, 우리 부부가 서로에게 해주는 것들은 스스로 해도 상관없는 너무나 사소한 것들이다. 그럼에도 결혼 10년 차에 물을 떠다 주고, 티슈를 뽑아주고, 캔 뚜껑을 따주는 것은 우리 부부만의 사랑의 언어다. 나는 당신을 항상 보고 있고, 생각하고 있어요. 당신이 조금 더 편안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라는 말을 눈빛으로, 행동으로 하는 것이다. 말을 내뱉기는 너무 쉽지만, 행동은 그보다 몇백 배 어려운 걸 알기 때문에 이러한 배려에서 더 큰 사랑을 느낀다.


'당신이 재채기를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 나는 티슈를 뽑으러 가요. 나는 당신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항상 당신을 지켜보기 때문이죠.'


'나는 당신이 요즘 어떤 디저트를 먹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어요. 항상 당신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게 먼지 항상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우리 부부의 대화이고, 이게 우리 부부의 언어이다.


우리 부부는 사랑한다고 자주 말한다. 그럼에도 그 말을 하고 있지 않을 때도 서로가 서로를 다정하게 쳐다보고 있고,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나에 대한 배려가 묻어있다는 걸 안다. 나 역시 그렇기 때문이다. 상대가 조금 불편해하는걸 먼저 알아채고, 챙기고 보살피려고 노력한다. 마치 부모님이 자식을 보살피듯이 한다. 적어도 나는 그런 보살핌에서 온전히 내가 사랑받고, 사랑하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다. 내가 그렇기 때문에 그도 온전히 사랑받고 있구나 느꼈으면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티슈를 뽑으러 간다.


사랑과 결혼은 일방적일 수 없다. 내가 챙김을 받고, 내가 존중을 받고, 내가 사랑받고 싶다면 서로가 같은 언어로 챙기고,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절대 혼자 다 받으려고 하면 안 된다. 그 크기는 다를지언정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있다는 마음만 알면 된다. 그 마음을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된다.


우리 부부에게 처음으로 왕이냐고, 왕비라고 이야기한 사람이 있다. 지금은 시커먼 중학생이지만, 유치원에 다니던 조카가 했던 말이다. 그 어린아이의 눈에도 서로를 위하는 모습이 보였었나 보다. 어른들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서로에 대한 배려가 어린아이의 눈에는 그대로 보였나 보다.



PS. 긴 글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구독과 좋아요는 작가를 희망하는 저에게 큰 원동력이 됩니다. 부탁드려요. 덥고 습한 날씨지만 건강 잘 챙기시기를 바라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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