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에 몸을 맡기면서요...
기흥역에는 문학자판기가 있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역과 기흥역은 네다섯 정거장 정도의 거리 차이가 나 자주 가지는 않지만, 에버랜드ㅡ수원에 사는 이점ㅡ를 갈 때마다 기흥역에 들리게 된다. 기흥역에 들릴 때마다 하는 루트가 있는데, 그게 바로 문학자판기에서 글을 뽑는 일이다. 짧은 글과 긴 글 두 종류를 뽑을 수 있는데, 나는 주로 짧은 글을 뽑는다. 마치 타로를 보는 것처럼, 당시의 내 상황에 맞는 글이 뽑히면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지지난 주에 친구와 에버랜드를 갔다. 에버랜드를 간다하면 기흥역을 들리고, 그렇다면 문학자판기 앞에 서지 않을 수 없다. 그 날도 여느 때와 같이 짧은 글을 인쇄했다.
"두목, 산다는 게 뭔지 알아요? 허리띠를 풀고 말썽을 만드는 게 바로 삶이지요. 산다는 게 곧 말썽이에요."
짧은 글은 종종 나에게 신기한 감각을 주곤 한다. 내 상황이나 처지에 비슷한 글이 뽑힌다고 하여 다가 아니라, 어쩐지 요상하게, 내 심지라고 해야할까, 내 동맥이라고 해야할까ㅡ그런 부분을 꾹 눌러주는 문장을 건네주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자유이다. 명예, 돈, 사랑, 자유라는 선택지를 내민다면 나는 망설임없이 자유를 고를 사람이다.
'완전한 자유'라는 개념이란 너무나도 철학적이고 어렵기 때문에, 내가 가치있게 여기는 자유는 순간의 자유이다. 어쩌면 그 순간이 삶을 의미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 문장은 그런 존재였다. 나라는 사람 안에 깊숙히 있는 심지를 건드린 느낌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조르바가 삶이라는 건 허리띠를 풀고 말썽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내가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책을 마주한다는 것은 필연이었으리라.
왜요가 없으면 아무 짓도 못 하는 건가요? 가령, 하고 싶어서 한다면 안 됩니까? 자, 까짓것, 날 요리사라고 치쇼. 난 수프를 만들 수 있어요. 당신이 들어 보지도 못한 수프, 생각도 못 해본 수프....
-17p
'나'와 그 남자의 첫만남은 어이없을 정도로 갑작스러웠다. 크레타 행의 배를 타러 온 나에게, 6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여행을 하냐 묻다가, 자신을 데려가달라고 한다. 나는 대답한다. '왜요? 함께 무슨 일을 할 수 있어서요?'. 남자는 '왜요'라는 말에 못마땅하다는 듯이 소리친다. 그 태도가 재미있고 마음에 든 나는, 남자와 함께 떠나기로 한다. '나'는 느꼈을 것이다. 이 남자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아마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선명하지 않지만.
남자에게는 저울이 없었다. 한다면 하고, 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것. 그에게 '왜?'라는 의문은 사치일 뿐이었다. 나는 남자의 가방에 시선을 옮기고 그 가방에 무엇이 들었냐고 묻자, 산투르가 들었다고 대답한다. 먹고 살기가 고될 때는 종종 산투르를 연주하며 여인숙을 돌아다니기도 한다고. 이제야 나는 그에게 이름을 묻는다. 그리고 그는 답한다. '알렉시스 조르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 수도 있겠지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 해요. 하려고 해도 안 돼. 할 수가 없어.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조르바?
이런, 모르시는군.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게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 21p
크레타에 도착한 나와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의 여인숙에 머물게 된다. 조르바는 오르탕스 부인에 관심을 가지고, 오르탕스 부인 역시 조르바를 의식한다. 조르바는 뛰어난 입담과 센스로 술에 취해 외로워하는 오르탕스 부인을 젊고 아름답던 과거의 영광으로 돌아가게 해 주었고, 오르탕스 부인은 조르바에게 흠뻑 빠지게 된다.
나는 모과향이 나는 한 과부에게 성적 매력을 느낀다. 나는 그것을 여성의 형태를 한 악령인 마라라고 믿으며, 붓다의 집필에 전념한다. 갈수록 과부의 생각에 점철되어가는 나는 조르바와 살아가며 그에게서 느낀 자유, 정열을 떠올린다. 그리고 과부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함께 가주면 가고, 그러지 않으면 안 갈래요.」
「왜? 너는 자유인이잖아?」
「아니. 자유인 아니에요.」
「너는 자유를 원하지 않아?」
「예. 원하지 않아요.」
나는 제대로 들은 건가 싶었어요. 정말로
「아니, 너는 자유를 바라지 않는다고?」
「그래요. 싫어요. 싫어요. 자유가 싫어요!」
두목, 나는 롤라의 방에서 롤라의 편지지에다 이 편지를 쓰는 겁니다.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울여요. 나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아요. 그런데 여자도 인간일까요?
제발 빨리 좀 대답해 줘요.
우리 두목에게 행운이 있기를 빕니다.
- 나, 알렉시스 조르바
광산 사업을 위한 장비를 구해오라고 보낸 조르바가 닷새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나는 칸디아에게 조르바가 보낸 편지를 받는다. 편지를 읽고 나는 어떤 반응을 해야할지 몰랐다. 화를 내야할지, 웃어야 할지, 감탄해야할지. 나는 조르바에게 즉시 돌아오라고 답장을 보냈고, 조르바가 돌아오자마자 화를 내줄 셈이었다. 조르바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뛰어나가 반가워하고 싶은 맘을 꾹 참고, 잔뜩 화난 척을 하며 조르바에게 무뚝뚝하게 대할 생각이었지만, 역시 쉽지 않았다.
과부와 오르탕스 부인이 죽었다. 과부는 마을 촌장에게 목이 따여 죽고, 오르탕스 부인은 병세로 시들시들 앓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광산 사업도 처참하게 실패한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튄 불꽃과 잔해들에 겁을 질린 사람들은 다 도망가, 바닷가엔 조르바와 단 둘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그리고 술을 마시며 평소같이 줄줄 흐르는 조르바의 이야기를 듣다가... 소리친다. 조르바, 춤 좀 가르쳐 주세요!
항상 춤을 추는 조르바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던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춤을 추고, 웃고, 모랫바닥에서 뒹굴며 나는 생애 처음 느끼는 해방감을 맛본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랑,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그러나 내가 해방감을 맛본 순간은 바로 이때였다. 모든 것이 끝나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순간 말이다.
화자인 '나'는 지식인이다. 한 단어로 나쁘게 말하자면 '책벌레', 두 단어로 넓힌다면 '글쟁이'가 되겠다. 그런 나의 앞에 나타난 조르바는 즉흥적이고, 정열적이며 자유롭다. 곡괭이를 쥐던 손으로 연주를 하고 싶다며 산투르를 치고, 가볍게 여자들을 만나며 몇 번의 결혼을 하기도 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때에는 갑자기 자리에 일어서서 춤을 춘다. 책으로 세상을 그리던 '나'는 몸으로 세상을 배워온 조르바의 모습을 보고 무력감과 동시에 압도적인 끌림을 느낀다.
작품 안에서 '나'는 이름이 없다. 조르바가 두목이라고 불러줄 뿐, '나'는 '나'로서만 존재한다. 우리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조르바의 야만스러운 세계에 푹 빠지게 된다. 질낮은 농담, 그가 살아온 이야기... 조르바의 행동과 몸짓 하나하나를 바라볼 때 어느 순간 화자인 '나'처럼 웃게 되었다. '나'는 정말로 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 이야기 속의 '나'가 아닌 진짜 나의 이야기를 해보자.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라고 했었다. 왜냐하면 나는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누가 그렇지 않겠냐만은, 나는 내 스스로가 '자유로워야 할 상황'을 침해받는 것이 싫다는 말이다. 가벼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오랜 시간 미술을 하다가 글을 쓰고 싶어졌다고 치자, 그런데 미술 선생님이 '여기까지 한 게 아깝지 않아? 그냥 미술을 하자'고 조언을 한다면 그 순간 미술은 내 삶과 멀어져버리는 것이다. 그만큼 나는 내 선택을 내 스스로가 존중한다. 내 선택은 자유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단순한 자유를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하고픈 것에 대한 자유. 그러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자유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다. 화자 ‘나’가 자유를 느끼는 순간은 광산 사업을 결심했을 때도, 자신의 의지로 과부에게 향했을 때도 아니다. 조르바와 함께 모든 사업을 말아먹고, 돈도 사랑도 전부 잃었을 때, 그는 비로소 자유를 느낀다. 자신을 이루던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가는 그 순간에 말이다. 난 그와 조르바가 진정한 자유를 깨달은 순간이 같다고 생각한다. 조르바 역시 아이의 죽음, 전쟁 속 동료의 죽음, 타인의 죽음, 여자들과의 가벼운 만남과 수많은 이별을 겪으며 자신의 삶을 이루던 것들이 손에서 떠나갈 때마다 자유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 수많은 이별의 경험들이 돌이 되어 자유라는 탑을 이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겠지.
그러니 진정한 자유는 쥐고 있는 것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건네받는 보상 같은 게 아닐까. 조르바는 수많은 상실을 통해 그 보상을 받은 것이고, 나와 화자는 아직 받지 못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영원히 받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는 조르바처럼 춤을 출 수 있을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유를 묻지 않고 자유롭게 몸을 맡길 수 있는 순간이 올까. 만약 그 순간이 온다면....
조르바, 난 당신처럼 춤을 추고 싶어요. 자유에 몸을 맡기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