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어둠의 사육제를 읽고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2026년에게 편지를 받았다. 〈나 일주일 후에 찾아갈게〉... 라고. 분명 내가 기억하는 2026년과의 거리감은 짧게 잡아 100일 정도였다. 100일이 남아 그동안 나를 위한 일기를 쓰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었던 참이었단 말이다. 그러다가 눈을 뜨니 2026년과 2025년의 사이에는 친구들과 하는 작별인사가 이젠 '다음 주에 봐~'가 아니라 '다음 해에 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틈만이 남아버린 것이었다.
최근 들어 체감하는 말이 있다. 10대의 몇 년보다 20대의 하루, 그리고 일 년이 배워가는 것이 훨씬 많고 다르다는 것. 여전히 덤벙대고, 귀찮아하고, 꼼꼼하지 않은 나 그대로지만, 스무살 때의 나와 지금을 비교했을 때 (고작 2년 차이지만) 정신적으로는 확실히 더 단단해진 것 같다. 그리고 본래 그런 성향이었지만, 올해 들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행위 자체에 더욱 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가치관이 조금 더 분명해졌다고 볼 수 있는데, 쉽게 말하자면 '흑백논리에 사로잡히지 말 것'이 나에게 크게 자리잡았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다양한 입장이 중요하다!'는 너무 뻔하고, 모든 것을 선과 악, 흑과 백으로 나누며 살아간다는 것은 남은 삶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 것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선과 악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친구가 보는 만화를 옆에서 함께 볼 때 가장 먼저 던지던 질문은 언제나 이것이었다. '쟤는 착한 애야?' 혹은 '쟤는 나쁜 애야?'.
그리고 머리가 조금 크자, 선역과 악역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씌운 프레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선역이라고 칭하는 존재와 악역이라고 칭하는 존재를 프레임 선역과 프레임 악역이라고 해 보자. 프레임 악역에게 프레임 선역은 악역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프레임 악역은 어머니의 복수를 하기 위해 준비 중인데 어떤ㅡ사람들이 칭송하는ㅡ 프레임 선역이라는 존재가 방해해버리는 것 아닌가! 프레임 선역이 세상을 구한다는 대의적인 행동을 하면서 지나가던 시민 1의 차를 내동댕이 친다면 시민 1에게 프레임 선역은 악역이 되는 것이 아닌가.
성인이 된 후로 선악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았는데, 작년에 한 작품을 접하고 다시 고찰하게 된 적이 있었다. 한 해의 끝을 맞이하고, 복잡해진 머릿속과 점차 자리를 잡아가는 가치관이 다시 그 작품을 떠오르게 한다. 나에게 선과 악의 실존에 대한 질문을, 혹은 그 경계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 작품. 그 작품의 이름은 『어둠의 사육제』다.
어둠의 사육제는 한강의 소설집 『여수의 사랑』에 수록된 단편 소설이다. 『여수의 사랑』은 한강 작가의 첫 소설집으로, 여섯 개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는데 그 중 어둠의 사육제는 두 번째 목차에 있다. '사육제'라는 뜻이 무언가 하니 영어로는 카니발(carnival), 육식을 금하기 전에 즐기는 축제로 사순절 직전 3-7일에 걸쳐 행한다고 한다.
이야기를 이끄는 중심인물은 주인공인 나(영진)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명환, 영진과 함께 서울로 상경한 인숙 언니이다. 영진은 인숙 언니와 돈을 모으며 상경을 꿈꿨지만 언니는 전셋금을 모두 빼돌리고 사라진다. 이후 영진은 이모의 집에서 바퀴벌레 취급을 당하며 빌붙어 살아간다. 사촌 동생들에게까지도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는 영진은 결국 베란다까지 내몰리게 되고, 반대편에 사는 명환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명환은 영진에게 자신의 집을 그냥 줄테니 받아 살라고 계속 권유한다. 그는 사고로 인해 임신한 아내와 뱃 속의 아이를 전부 잃었다. 이후 사고를 낸 젊은 부부가 사는 아파트에 찾아와 종종 서성인다.
표면적으로 보면 인숙 언니는 나쁜 사람이다. 함께 모으던 전셋금을 빼돌려 배신하고, 사과는 커녕 연락도 없다. 명환은 이상한 사람이다. 다리를 절뚝대며 젊은 부부와 영진의 곁을 서성거리며 불편하게 만든다. 젊은 부부는 불행해야 할 사람들이다. 명환의 가족을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나? 미디어와 세상이 말하는 흑과 백에 '대입'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살아왔고, 이들의 행동들을 흑백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하여.
영진은 주인공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나'이자 화자이다. 일곱 자매 중 셋 째였던 영진은 성적도 특출나지 않고 똑부러진 데도 없어 진학 지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녀는 영문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꿈 하나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을 시작한다. 삶이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대학 진학이라는 꿈은 그녀의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어느 날, 어린 시절 같이 지내던 인숙 언니를 만나게 된다. 인숙 언니와 같이 살며 진학의 꿈을 이루던 영진은, 인숙 언니의 배신으로 인해 삶이 산산조각난다. 이후 이모의 집에서 머무르며 명환의 권유를 받지만, 끝내 거절한다.
인숙 언니는 어린 시절 영진의 앞집에 살던 언니다. 성인이 된 후 영진과 만나 함께 살고 있었지만, 영진이 외출한 날 전셋금을 모조리 빼돌리고 도망간다. 시간이 흐르고 상사의 모친상으로 영안실에 들린 영진을 만난다. 마르고 앙상하던 인숙 언니는 주름이 접힐 정도로 살이 쪄 있었고,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았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차림을 하고 있었다. 인숙 언니는 간암이었고, 그녀의 아버지 또한 간암으로 죽었다. 그 사실을 아는 언니는 아버지와 똑같이 죽어가고 싶지 않아, 간암 판정을 받자마자 전셋금을 모조리 가져가 자신의 수술비로 쓴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이제서야 만난 영진에게 고백한다. 살고 싶었다고.
명환은 영진에게 자신의 집을 주고 싶어하는 남자이다. 그는 임신한 아내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젊은 부부가 탄 차에 사고로 죽었고, 명환은 한 쪽 다리가 깔려 목발을 짚는 신세가 되었다. 합의금을 받았지만 모든 것을 잃은 명환은 전 재산을 넣어 젊은 부부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오게 된다. 매일 아파트의 사람들을 노려보고, 부부의 집을 서성이는 것도 모자라 종종 집에 들어가 죽은 아내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부부 뿐만 아니라 주민들 모두가 그를 기피한다. 어느날 그는 반대편 베란다에서 자는 영진을 보고, 자신은 이제 집이 필요 없으니 집을 그냥 주겠다며 영진에게 끊임없이 권유한다.
내가 어떻게 전활 하겠니?
"괜찮은 사람이었소.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소. 그자가 썩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명환이 영진에게 자신의 몰락과 젊은 부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 영진이 인숙 언니를 떠올리는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어둠의 사육제라는 소설을 관통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진의 머릿 속에서 떠오르는 영안실에서 만났던 인숙 언니의 모습과 명환이 말하는 젊은 부부에 대한 이야기가 오버랩 되며, 명환은 그토록 증오하던 젊은 부부가 사실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남편은 명환에게 무릎을 꿇었고, 모두 자신의 죄이니 아내와 아이들은 건들지 말아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명환은 사실 그들의 죄는 이미 휴짓조각만큼 작아졌다는 것을 알았다. 불의의 사고는 명환의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그 사고에 이들의 악의라고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진 역시도 인숙 언니가 달아났던 때에는 살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만난 인숙 언니의 처절한 모습을 보자 영진은 기묘한 기분이 든다. 영진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인숙 언니의 모습은 분명 악한 존재였는데, 죽어가고 있는 언니의 모습을 보니 미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인숙 언니는 영진의 미래, 대학, 희망이 담긴 전셋금을 가져갔다. 인숙 언니는 영진이 꿈꾸는 것들을 함께 상상할 수 없었다. 죽을 것이었으니까. 치료하지 않았다면 아버지처럼 앓다가 비참하게 생을 마감할 것이었으니까.
명환은 모든 주민들이 기피한다. 외다리로 절뚝거리며 살의에 찬 눈빛으로 주민들을 바라보고, 젊은 부부에게 찾아가 그들을 괴롭게 만든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백지가 된 그는 자신에게 어떤 흔적이라도 남겨야 했고, 누군가를 탓하고 증오하면서라도 자신이 여전히 숨 쉬고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젊은 부부는 명환의 행복하던 일상과 미래를 앗아갔지만, 고의가 아니었다. 비극적인 사고였고, 이에 대한 책임 역시 회피하지 않았다. 그러나 명환의 인생은 이미 망가져버렸다.
누군가는 전셋금을 앗아간 인숙 언니가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홀로 살아가기 위해 영진을 배신했으니.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그녀에게는 전셋금이고 뭐고 중요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살지 못하면'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선과 악을 논하는 기준에는 '이해'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정말 이들 중 누군가가 선인인지, 악인인지 정의할 수 있는가? 살기 위해, 버티기 위해, 우연히 저지른 행동들에 프레임을 씌워 바라볼 수 있을까. 조금 더 나아가서, 이해의 영역으로 발을 옮긴다면 어떨까. 나는 앞서 말했던 것과 같이 흑과 백을 가르는 기준이 ‘행위’가 아니라, '이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누가 더 포용력이 거대한가에 관한, 즉 용서를 말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서 어디까지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관한 것이다.
사육제. 육식을 금하기 전에 3-7일 정도 짧게 즐기는 축제. 어둠의 사육제는 명환이 생을 마감하기 전, 영진이라는 사람을 만나 오랜만에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은 기간일지도, 영진에게는 대학에 진학하고 꿈을 이루기 전 찾아온 과도기였을지도, 혹은 모두가 각자를 이해하기 이전에 순수하게 증오할 수 있던 시간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둠의 사육제는, 막을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