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멸망은 내 손에 달려 있어

이와이 슌지, 피크닉을 보고

by Barrett
나는 지구가 언제 멸망하는지 알아.

그건 있잖아... 내가 죽을 때야.

지구는 내가 태어나면서 시작됐어.

그러니까 내가 죽으면 지구도 함께 없어질 거야.


게시글을 내리다가 우연히 이 대사가 담긴 사진을 봤을 때 느꼈던 감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날개를 등 뒤에 지닌 채 멸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녀는 마치 검은 날개를 가진 천사처럼 보이기도, 까마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상 깊었던 이유는 비주얼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말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가 태어나기 전, 내가 죽은 후로도 쭉 이어져가겠지만, 내가 죽는다면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아, 우선 신년이 시작한지 이제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슨 멸망이니 종말이니를 말하나 싶긴 하지만, 멸망은 시작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오히려 그런 주제를 새롭게 시작되는 시기에 다루기에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새해 첫 글은 해방과 멸망을 담은 이야기, 이와이 슌지의 영화 피크닉에 대한 글로 정하게 되었다.



〈피크닉〉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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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닉〉은 1996년 개봉한 이와이 슌지의 영화로, 국내에서는 비교적 최근인 2025년 9월 17일 재개봉했다. 러닝타임은 72분으로 짧은 편이며, 작품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은 코코, 츠무지, 사토루 세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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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한 여자가 길바닥에 장미꽃을 조심스레 내려놓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곧 한 차량이 갑자기 그 위를 지나가며 장미꽃을 모두 짓밟는다. 그 차는 코코가 탄 차로, 코코는 부모님에 의해 정신병원에 끌려가게 된다. 새하얀 옷을 입은 간호사들은 모두 친절하고 미소를 지니고 있지만, 발버둥치는 코코를 놓아주지 않고 강제로 붙잡아 끌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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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는 담 위에 서 있는 츠무지와 사토루를 보게 된다. 코코는 그들의 뒤를 따라갔지만 츠무지와 사토루는 갑자기 멈춰 선다. 이 이상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코코는 왜 안 되냐며 재차 묻다가, 아무렇지 않게 담을 넘어 가보지 않은 담으로 올라선다. 츠무지는 코코를 따라가고, 사토루는 고민하다 결국 가지 않는다. 코코와 츠무지는 목사를 만나 그에게 성경을 건네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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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무지, 코코, 사토루는 담을 넘어 지구의 최후를 위한 피크닉을 떠난다. 어둡고 폐쇄된 정신병원과 달리 이들이 걸어가는 담 위에는 푸른 하늘이, 아래에는 넓은 마을과 전경이 펼쳐진다. 살랑살랑 부는 바람은 이들을 자유로 이끌어줄 것만 같다. 신고를 받고 온 경찰이 제재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고, 경찰의 허리춤에 있던 총을 꺼낸 채 다시 걸어간다. 사토루는 뒤처지고, 발을 헛디뎌 담에서 추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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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 속에서 둘은 서로의 죄를 고백한다. 츠무지는 비가 오는 날에 초등학교에서 선생을 죽였다. 자신을 괴롭히던 초등학교 담임이자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담임이 되었다고. 코코가 고등학교 담임이었지 않냐 묻자 횡설수설하는데, 이때 츠무지는 괴롭힘의 트라우마로 학창시절 쭉 환각을 보았던 것 아닐까 싶다. 코코 역시 말한다. 자신을 따라하는 자매와 서로 목을 졸라 살아남는 아이가 진짜인 걸로 치자며 정말 목을 졸랐는데, 자신이 이겼다는 것이다. 고백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시발점이었고, 둘은 키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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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와 츠무지는 부둣가에 도착한다. 더이상의 담은 없다. 다음 발걸음은 바다다. 등대 아래까지 올라간 이들은 광활한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느낀다. 츠무지는 바닥에 누워 성경을 읽는다. 멸망일에는 거대한 불바다가 되고, 바다가 피로 잠긴다는 내용을 읽으며. 그러나 여전히 멸망은 찾아오지 않는다. 츠무지는 갑자기 코코에게 총을 받아 태양을 향해 총을 쏜다. 이렇게 하면 폭발할 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당연하게도 태양에는 닿지 않고, 원망스러운 노을만이 일렁인다. 코코는 자신이 죽어야 지구가 멸망하니, 이로 네 죄를 씻어 주겠다며 자신의 머리에 총구를 겨눈다. 코코의 겉옷에 달린 까마귀 털이 마치 사라지듯 흩날리고, 츠무지는 죽어가는 코코를 안은 채 울부짖는다. 그렇게 코코는 지구 멸망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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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담을 걸어간다. 멀쩡한 바닥을 놔두고, 잠깐 정신병원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자유와 마찬가지인 순간임에도 담 위를 걸어간다. 나는 담을 이들이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어떠한 경계라고 느꼈다.


코코가 웃을 수 있는 순간은 자신의 것을 지킬 수 있을 때다. 뺏길 뻔 했던 검은 날개의 겉옷을 꼬맬 때, 자신이 좋아하는 검정색 물감으로 흰 환자복을 칠했을 때... 그리고 담을 건널 때. 작 중에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담 아래, 즉 땅을 딛고 걸어다닌다. 이들은 담 위를 걸어가는 코코, 츠무지, 사토루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예외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교회의 목사이다. 그들을 체포하러 온 경찰과 탐탁치 않게 바라보던 서커스 관람객들과 달리 목사는 두 사람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봤다. 어디서 왔는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깊게 묻지 않고 츠무지와 코코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사실 성경책을 줌으로써 츠무지가 종말과 신을 믿게 되고, 코코의 죽음이라는 결과까지 겪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사는 적어도 그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다.


'담'은 코코, 츠무지, 사토루에게도 각각 다르게 다가가는 요소다. 코코는 처음으로 가보는 담을 겁 없이 건넌다. 츠무지와 사토루는 코코 이전부터 정신병원에 함께 있었음에도 더 먼 담을 향해 발을 내딛지 못했었다. 코코를 만나고 츠무지는 그녀를 따라 담을 건넜고, 사토루는 외면했다. 최후의 담을 건널 때 츠무지는 묵묵하게 앞을 보고 걸어갔지만 사토루는 계속 도태되며 그들을 따라 걸어가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서도 이러한 성향 차이를 보이는데, 사토루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림을 그렸지만 코코와 츠무지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사토루도 끝에선 담을 건너긴 했지만 구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고, 그것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어쩌면 '담'은 사토루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츠무지와 코코는 자유를 갈망했다. 사실 츠무지는 다음 담을 건너고 싶어했고, 코코가 그 손을 건네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토루는 '정신병원' 안에서 코코를 처음 본 순간부터 호감을 느끼지만, 정작 코코가 구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츠무지였다. 츠무지와 코코는 '담' 위에서 자유를 느끼고, 서로에 대해 알아가며 사랑을 고백한다. 정신병원에 있을 때에는 관심도 없던 두 사람이 담 위에서 감정을 나누는 것은, 담은 그들이 잠깐이라도 살아갈 수 있는 경계임을 보여준다.



지구의 멸망은 내 손에 달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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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코의 지구는 멸망했다. 스스로 말하던 멸망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녀를 버린 부모님은 그녀를 탄생시킨 신이었고, 눈을 감는다면 그녀를 보듬어주던 지구는 멸망한 것이다. 코코는 모두가 두려워하던 담을 자유롭게 건너는 아이였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츠무지의 삶은 종말했다. 한 손에는 선생을 죽인 피가, 볼에는 자살한 코코에게서 튄 피가 묻어 있다. 츠무지는 성경을 읽고 신을 믿었고, 지구 최후를 보기 위해서 담을 넘었다. 만약 성경에 빠지지 않았다면, 최후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면.


츠무지가 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목사'의 역할이 그들을 도와주는 키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시 곱씹다보니 어쩌면 종말을 불러온 건 목사가 아니었을까 싶었다. 이들의 삶은 암울해서 어떤 선택지를 맞이하든 비참했을듯 싶지만, 어쩌면... 다시 담을 되돌아가 불분명한 신분으로 알 수 없는 곳이라도 정착해 어떻게든 살아가면 안 되었을까. 그들에게 담 아래는 가시밭길이겠지만, 최후를 맞이하기까지 붙어있는 숨을 어떻게든 이어나가야하지 않겠는가.


게시글을 내리다 우연찮게 본 영화 사진은, 나에게 있어 한 다섯 번째 쯤의 좌우명이 되었다. 좌우명이 좀 많아서 말이다. (첫 번째 좌우명은 인터스텔라의 '우린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이고, 종종 잘 써먹는다.) 어찌 되었든 나는 부모님이 신이라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지만 내가 죽으면 지구도 멸망한다는 말에 동의한다. 멸망까진 아니더라도, 세상의 끝 정도는 되겠다. 잘못 말하면 꽤 나르시즘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긴 한데, 내가 눈을 떴기에 내가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이 생겨난 거고, 내가 숨이 멎으면 모든 것이 정전되어 무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그렇게 나에게는 인식할 수 있는 세상이 사라진 것이니, 지구 멸망과도 같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새해를 맞이했음에도 멸망에 관한 글을 쓸만큼 나에게는 꽤나 인상깊은 영화였다. 그리고 탄생과 종말은 순환하는 것이니까, 모든 것들이 새롭게 시작되는 시기에 적고 싶었다. 지구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됐으니, 내가 죽으면 지구가 멸망한다라... 이과가 들으면 기겁할 말이겠지만 난 대사에 동의하는 바이다. 또 이 영화가 와닿았던 것은 이들이 자유를 느끼는 모습이 흐뭇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비통한 삶 속에서 피어난 달콤한 자유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검은 날개를 가진 소녀는 지옥에 갈까, 천국에 갈까. 그건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멸망은 해방이 되지 않았을까 곱씹어 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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