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시마 유키오, 가면의 고백을 읽고
방어란 타인의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행위다. 외부로부터 오는 공격에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감싸겠다는 본능적인 행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수하는 것이 얼마나 용감한 일인가! 이 무언가를 '상자'로 구체화하고, ‘자아’라고 이름 붙여보자. 겉면이 초록색으로 뒤덮여있는 포장지를 들키기 싫어 분홍색 크레파스로 그 위를 덧칠한다. 분홍색 크레파스는 이미 존재하는 초록을 덮을 수 있을까? 가슴팍 안에 상자를 가두고 일면만 보여준다면 분홍색이 드러날지도 모르겠지만, 품에서 나온 상자는 괴상하게 색이 섞여 있는 상자가 되었을 뿐이다. 결국 상자는 내 것인데, 들키기 싫다는 이유로 망가뜨려 버리는 것이다.
자기 방어란 보여주지 않기 위해 급급히 무언가로 덧칠하는 행위다. 자기 방어는 잘못이 아니다. 단지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 위에 존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왜 올리냐는 의문에서 우러나오는 고찰이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러한 의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푹 뒤집어 쓰고 있는데, 이 작품을 통해 자신의 삶 중 절반을 넘게 함께한 '것'을 풀고, 써내려간다. '것'을 '가면'으로 치환해 본다. 그렇다면 이제 〈가면의 고백〉이라는 자전적 소설의 첫 페이지를 넘겨볼 수 있겠다.
〈가면의 고백〉은 미시마 유키오의 자전적인 성향을 띄는 소설로, 그의 심미주의적 세계관을 잘 드러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충격적인 내용과 그에 대비되는 아름답고 수려한 문체는 그의 작품이 매력적이라고 느껴지는 요소 중 하나일 테다. 소설은 1,2,3,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은 그의 유년 시절과 본능에 대한 내용인데, '나'라고 불리우는 화자가 태어났던 순간을 기억한다는 허무맹랑한 선언으로 시작된다.
화자는 사고로 죽음의 문턱을 한 번 넘고, 허약한 몸을 지닌 채 살아가게 된다. 허약해진 다섯 살의 화자는 강인한 몸을 가진 분뇨 수거인에게 동경을 느끼며 '그처럼 되고 싶다'라는 불온전한 욕망을 품는다. 이 욕망은 같은 성별인 '남자'에게만 허용되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그는 덴카쓰 (여성 마술사)와 클레오파트라에게도 동경을 느끼는데, 그는 알아차린다. 남성ㅡ분뇨 수거인과 같은ㅡ에게 품는 감정과, 여성에게 품는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사실 당시 글을 쓴 25살 미시마 유키오의 눈이기에 그것이 끌림이었다고 단정지을 수 있었다고 본다. 대ㅡ여섯살의 아이는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특히 과보호스러운 조모와 함께 살고 여성, 즉 덴카쓰의 흉내를 낸 자신을 혐오스럽게 바라본다는 사실이 그가 생애 첫 가면에 손을 뻗기 위한 조그마한 움직임을 일으켰을 것이다.
위 그림은 귀도 레니의 〈성 세바스티아누스〉이다. 어둑한 하늘과 그를 지탱해주듯 자라난 나무들, 겨드랑이와 옆구리, 배에 화살이 꽃힌 채 손이 묶여 있는 반 나신의 남성. 비극적인 듯이 보이면서도 남성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가 있는 것을 보면 혹 이를 원했는가ㅡ라고 느껴지는 듯한 오묘한 작품이다. 열 세살의 화자는 이 그림에 강렬한 끌림을 느낀다. 이 작품은 트리거가 되어, 그는 자신이 끌리는 방향성에 대해 자각한다. 이후 동급생이자 열 셋, 넷의 소년인 자신에 비해 강인한 매력을 가지고, 남성적인ㅡ말 그대로 2차 성징이 온ㅡ 오미에게 연정과 질투심을 함께 느끼게 된다. 그와 동시에 또래의 남성과 여성의 상호적인 끌림ㅡ관계에 관해 알아차리며, 자신이 정상의 경계에 서 있지 않다고 착각하게 된다.
고등학생에서 성인이 되어간 화자는 자신이 말하는 '정상성'의 범위에 들어가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이때, 징병에서 매번 제외되는 병약한 자신을 혐오하는지 군대에 관하여 심리적인 고통과 무모한 자신감을 호소하는데, 정말 군대에 갈 상황에 처하자 그의 성향을 보여주는 문단이 나온다.
아직 교활한 꾀에 능숙하지 못한 여우처럼 나 잡아가라는 듯 산기슭에서 태평하게 걸어가다가, 자신의 무지로 인해 사냥꾼의 총에 맞는 식의 죽음, 나는 그것을 원했다.
ㅡ그렇다면 군대는 참으로 이상적이지 않나. 그 때문에 나는 군대를 희망했던 것이 아닌가. 어째서 나는 미열이 벌써 반년 동안이나 계속된다고, 어꺠가 결려 견딜 수 없다고, 혈담이 나온다고, 바로 어제 저녁에도 잠자리에서 땀을 흠씬 흘렸다고 늘어놓았을까. 어째서 나는 당일로 귀향하라는 선고를 받는 순간, 감추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할 만큼 뺨을 밀고 들어오는 미소의 압력을 느꼈을까. 어째서 나는 병영 문을 나서자마자 그렇게 내달렸을까. 희망을 배신한 것이 아닌가. 고개를 숙이고 풀이 죽어 터벅터벅 걸었어야 옳지 않은가.
-128p
군대는 그의 가면을 잠시나마 벗겨주는 역할을 한다. 이후 여성과 남성,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찰하던 화자는 군대에 간 친구 구사노의 여동생 소노코와 교제하다 헤어진다. 소노코에게는 플라토닉적인 감정만을 느낀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럼에도 이후 종종 식사를 같이 하는데, 무도회장으로 들어간 화자와 소노코는 야쿠자 무리를 보게 된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남성 야쿠자에게 옮겨지고, 다시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자신, 그리고 '정상성'을 위해 자신인 척 하던 가면에 관하여.
작중에서 화자가 끌림을 느끼는 대상은 굉장히 많지만, 본능적인 끌림 뿐 아니라 복합적인 감정을 품게 해 주는 두 인물이 나온다. 바로 오미와 소노코이다. 오미는 학창 시절 화자가 처음으로 연정을 느낀 동성 상대로, 일방적인 강한 욕망을 느끼기도 한다. 오미는 학교에 나오지 않으며, 매번 사고를 치고 다니고 또래에 비해 성장이 빠른 아이였다. 키가 작고 마른 화자는 그에게 열등감을 느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과 그에 뒤따르는 비공격적인 질투심을 느꼈는데, 4장을 읽고난 후 이 관계에 힘을 실어주는 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런 식으로 매사를 향락으로 바꿔버리는 기묘한 천성이 있었다. 이 비뚤어진 천성 덕분에 나의 나약한 겁쟁이 기질은 나 자신의 눈에조차 이따금 용기로 잘못 비춰졌다. 하지만 그것은 인생에서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은 인간의 안이한 보상 심리라고나 할 천성인 것이다.
- 155p
오미를 바라보는 열 세살의 시선은 어딘가 뒤틀려 있다. 사랑과 욕구의 저울이 있다면 욕구로 완전히 기울어버릴 듯한 것이었다. 오미에 대한 사랑이 질투로 변해갈 때, '그가 되고 싶다'라는 인식은 다섯 살, 분뇨 수거인에게 느끼던 감정과 동일해져 있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분뇨 수거인과 같은 남성들에게 느꼈던 감정의 흐름은 '되고 싶은 것'에서 욕망으로 변해갔다면, 오미는 욕망에서 '되고 싶은 것'의 차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감정 흐름이 자신이 사랑하는 남성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그는 인용한 윗 문장처럼 감정이 가열되면 회피하기 위해 다른 감정으로 바꿔버리는 행위를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다.
반면에 소노코와 교제할 땐 종종 언급하는 뉘앙스가 있는데, 나는 '정상성'을 위해 그녀와 있는 것이고, 이건 가면을 쓴 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소노코와의 교제는 당시 시대적 상황ㅡ남녀의 교제가 정상적이라는ㅡ에 대응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한 연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소노코 파트에서 느꼈던 것은, 그녀를 가면용으로 취급하는 것에 비하여 화자는 소노코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많이 한다는 것이었다. 욕망과 질투심만을 느꼈던 오미와 달리 소노코에 대한 사소한 것들, 이별 후에도 편지로 연락하는 모습들, 그녀의 편지를 기다리고 청혼 거절의 답장에 손이 떨리는 모습들은 그가 그녀에게 분명하게 이끌렸음을 보여준다.
화자는 마지막에 소노코가 아닌 남성 야쿠자에게 끌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난 소노코와의 만남이 '가면'이었다는 것을 또 하나의 가면을 쓰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맨 앞 장,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사를 인용한 페이지가 있는데, 끝 부분에 이런 대사가 있다. '그나저나 인간이라는 건 자신이 찔리는 것만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거야'. 소노코 부분을 읽을 때 이 문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알아챘다. 이미 화자는 유년 시절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ㅡ가족들로부터, 자신의 연정을 피하는 오미로부터ㅡ가면을 썼기에 이게 몇 겹인지, 가면인지 아닌지도 헷갈리게 된 것이라고.
화자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방향성을 박탈당한다. 여성 마술사인 덴카쓰를 남성인 화자가 흉내냈다는 이유로 하녀에게 옷이 갈기갈기 찢기듯 벗겨진다.
"덴카쓰다. 나는 덴카쓰야!"
라고 외치며 나는 방 안을 내달렸다. 내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너무도 열광한 나머지 내가 분한 덴카쓰가 수많은 이의 눈길을 받고 있다는 의식에만 빠져들어 나 자신밖에는 보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퍼뜩 한순간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어머니는 새파랗게 질려 넋이 나간 듯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스륵 시선을 내려뜨렸다.
나는 깨달았다. 눈물이 번졌다.
-26p
그럼에도 이후 화자는 분장에 대한 욕구를 멈추지 않았고, 클레오파트라의 모습을 동경하기까지 했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 분장 놀이에 골모했으나, 이 역시 조모와 부모의 눈을 피해 행한 것이었다. 그는 이때 자신이 하는 행위가 세상이 말하는 '정상성'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정상성'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화자의 가족에게 묻는다면 '남성은 남성의 옷을 입고, 여성은 여성의 옷을 입고 그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고민하지 않아도 뻔하다. 세상이 말하는 '정상'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으면 특이한 개체로 인식하고, 주어지는 혐오스러운 눈빛은 자신을 감추도록 만든다. 유년 시절의 화자는 결국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일찍이 가면을 만들어낸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의지로.
현재로 시선을 옮겨도 모두가 그럴 것이다. 가볍게 말하자면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나 취미가 같은 이들을 만나면 자기도 모르게 엄청난 말들을 쏟아붓고 있지 않던가. 이런 경험이 모두에게 한 번쯤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타인을 만나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타자의 움직임에 다치지 않도록, '내 것'을 지킨다는 아름다운 본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답기만 한 일은 아니다. '자기 방어'는 결국 자신을 갉아먹어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를 보여주지 못하고, 가면을 쓰고, 덧씌우고, 또 덧씌운다면... 맨 얼굴을 이제 기억해내지 못하고, 수십 겹의 가면에 허우적대는 것 밖에 할 수 없다.
'정상성'은 굳이 선을 그어보자면 세상에서 다수가 행하는ㅡ보편적이며 이해할 수 있는 행위에 붙은 이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다수가 다수에 인정받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면? 그러니 '정상성'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미 정상성이 허구임을 보여준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 소설을 탈고함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이 써왔던 가면을 벗어버리는 행위를 한다. 자신이 태어나는 순간을 기억했다는 이야기부터, 동성 동급생에게 가졌던 연정, 소노코와의 교제, 그 사이 속 피어나는 혼란과 괴로움... 이 모든 것들을 책 속에 녹여낸다. 정상성이라는 가면 속은 평안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자신은 이미 자기 방어를 하며 살아왔고, 이제 그 가면을 벗겠다는 선언을 독자들에게 남긴다. 그리고 선언 뿐 아니라 권한도 넘긴다. 자신과 수십 년 동안 함께했던 방어를 깨달라는, 그런 권한을.
미시마 유키오는 이 소설을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하였고, 역시 병약하고 부유했던 그의 삶과 맞닿아 떨어지는 내용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화자는 '나'로만 나오지, 미시마의 본명, 혹은 필명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여기서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이 있다. 이 작품은 정말 미시마 유키오가 가면을 벗은 것일까? 미시마는 가면의 고백을 통해 자신의 방어를 깨뜨렸다고 하지만, 그 자신도 이것이 솔직함이 담긴, 자신이 살아온 삶 전부가 담겼다는 것을 장담할 수 있을까.
그 의문을 독자들에게 넘겨준 것이다. 자 다시 상자로 돌아와 보자. 초록색 포장지를 분홍색 크레파스로 덧칠한 일면을 보여준다면 모두가 분홍색 포장지라고 믿는다. 어쩌다 보니 용기를 내어 비스듬히 덧칠이 안 된 면을 타인에게 보여준다면? 그들은 아, 초록색 표지였구나! 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닌 초록색 포장지인지, 분홍색 포장지인지 의문을 품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의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타인 스스로가 판단해야 한다. 미시마는 작품으로 고백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초록색인가, 분홍색인가. 진실인가, 또 하나의 가면인가. 어쩌면 그는 독자들에게 나 스스로도 다 벗을 수 없는 가면을 벗겨달라는 호소를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미시마의 고백을 담담하게 읽어내며, 그렇게 생각했다.
본능으로부터 피어나는 아름다운 자기 방어는 서서히 자신을 타인으로 몰고 간다. 허구의 '정상성'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이는 행위는 잠시동안 아름다울 뿐이며, 순간은 언젠간 깨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나는 미시마에게 받은 권한을 적어내려보았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도, 그 권한을 건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