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청난 경쟁률을 자랑했던 히든트랙에 입사했던 과정을 탈탈 털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2019년 7월 말.
2년 반 만에 복학해서 2점대로 시작했던 학점을 복구한다고 참 많은 밤을 도서관에서 지새웠더랬다.
마지막 성적이 나오던 날 기적처럼 3.50이라는 점수가 찍혔고 이제야 나도 최소한의 취업 준비를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초반에는 창업을 하게 되면서 일만 했고, 20대 중반은 아이를 키우며 공부했다. 나름 아주 열정적이고 강렬한 20대를 보낸 것 같은데 취업시장에서는 이게 잘 안 먹히나 보다.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시는 분께서 해주신 조언에 따르면 창업 경험은 이도 저도 아닌 물 경력에 일 오래 못하고 금방 퇴사할 이미지이며, 애 키우는 건 절대 밝히면 안 될 금기 사항이라고 하셨다.
자소서를 쓸 거면 내 혼을 쏟아부었던 창업 얘기는 싹 걷어내고 담백하고 무난하게 쓰라는 조언까지 덧붙여주셨다.
이런 이야기를 (심지어 한두 명이 아님) 듣고 안 우울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는 느낌은 사람을 쪼그라들게 했다.
처음에는 아이를 키우면서 일하려면 무조건 공기업에 가야 한다, 눈 딱 감고 공부해서 공무원이 돼라, 안정적인 대기업에 들어가야 한다 등등의 수없는 조언을 듣고는 정말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 마음이 불안하고 조급해지고는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서 오히려 반항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왜 애 엄마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살면 이기적인 거지?
왜 시작도 하기 전에 무조건 안 될 거라는 이야기만 하지?
왜 온전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을 거로 생각하는 거지?
수많은 Why 들이 떠올랐고 나는 그냥 내 마음이 가는 곳을 선택하기로 했다.
나는 IT 스타트업에 인사담당자로 입사하고 싶었다.
우선 '닭 머리보다는 소 꼬리가 되어라.' 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자랐기에 가장 핫한 산업인 IT 쪽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조직들을 경험하면서 나는 내가 직접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수평적 조직에서 일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또 교육 업계에서 4년간 일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고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좋았기 때문에 인사 업무로 첫 커리어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온 결론으로 나는 잡코리아의 대기업/ 공기업 공채란을 벗어나서 다양한 플랫폼에서 다양한 회사들의 공고를 살펴보았다.
그중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위커넥트에 올라온 히든트랙의 공고였다.
완전자율근무라는 멘트에서 이미 100% 넘어갔는데, 20명 남짓한 규모에 인사 담당자를 뽑는다는 것 자체가 굉장한 일이라 조직문화에 관심이 많은 집단이라는 것을 단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류 전형 마감 시간을 매우 급박하게 앞두고 열심히 지원서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유의한 것은 우대사항에 있는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짚어주며 내가 이 공고에 얼마나 적합한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타트업의 자소서는 대기업의 자소서와 다르다.
1. 스타트업 인사 담당자는 채용 공고를 빠짐없이 하나하나 읽어볼 확률이 높다.
2. 열정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기에 과한 어필을 해도 열정으로 해석할 여지가 높다.
3. 한 분야에 전문가보다는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낫다.
그래서 나는 일반적인 자소서 쓰기에서 이야기하는 핵심에 집중해라, 글의 양은 이 정도가 적당하다 등의 조언들은 무시했다. 그리고 우대사항에 연관지을 수 있는 경험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성실하게 적어나갔다. 그러고 나니 가독성이 그리 좋지는 않은 일반적인 자소서 2배 정도 되는 양의 글이 탄생했다. 조금은 걱정이 되었지만, 마감 10분 전이었기에 그냥 전송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내 분석이 맞았는지 서류에 붙었다. 그리고 다가오는 면접 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면접 복장은 앞코가 뾰족한 하이힐에 슬랙스와 힘 있는 셔츠로 결정했다.
평균 27살로 이루어진 조직에서는 분명히 이 회사가 첫 직장인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럴때 경험이 많고 프로페셔널해보이는 사람에게 더욱 매력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다.
(대기업, 공기업의 경우는 치마+앞코가 둥근 신발을 신으라고 많이 이야기하더라)
또 여러 키워드로 회사에 대한 글들을 다 읽어보았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올린 글이나 뉴스뿐만 아니라 대표/구성원들이 올린 사적인 글들도 다 찾아보았다.
브랜딩이 약한 스타트업에서는 지원자가 회사에 대해 큰 관심을 가져준 것에 유독 큰 감동을 받게 된다.
그리고 '이 회사에 지원한 이유 3가지'는 미리 준비해서 갔다. 요약하면 이렇다.
1. 완전유연근무제라는 것이 지원하게 된 큰 동기였다.
2.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인사 직무를 뽑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조직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조직에서는 내가 원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3. 나는 이 앱이 세상에 정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앞으로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각 동기에 대한 숨은 속뜻은 이렇다.
1. 완전유연근무제라는 것이 지원하게된 큰 동기였다.
→ 우선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을 100% 드러내며 구직을 하고 싶었다. 이 말을 했다고 나를 안 뽑는다면 나도 그런 회사에 다닐 마음이 없다는 배짱도 있었다.
회사도 공고에 지키지 못할 약속을 쉽게 하지 않는다. 분명히 유연 근무를 잘 컨트롤해오고 있던 과정들이 모여 자신 있게 공고에 내보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멘트가 '이 사람은 유연 근무가 필요하구나!' 라는 사실을 알릴 뿐이지 '이 사람은 일도 하기 전에 놀 생각만 하는구나.' 같은 이상한 해석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에게 중요한 조건이라면 면접 때 먼저 선빵을 날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2.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인사 직무를 뽑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조직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조직에서는 내가 원하는 문화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 지원 동기에 대한 부분이다.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알리면서 회사를 치켜세워주는 말을 넣을 수는 없을까 고심했다.
3. 나는 이 앱이 세상에 정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앞으로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 스타트업은 모두 미래 가치에 투자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비전에 대한 공감이 중요하다. 지원 동기에 꼭 회사 제품/ 비전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자.
그리고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오갔고, 며칠 뒤 대표자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대표와 만나는 자리에서는 더 구체적인 비전을 제시해서 어필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품과 관련된 비전과 직무와 관련된 비전을 나눠서 준비했다.
우선 제품과 관련돼서는 내가 실제 자주 사용하는 앱들을 분석해서 린더가 바뀌었으면 하는 방향성 들을 이야기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다. 이미 이 사람들은 몇 년 동안 한 제품에 대해서 치열하게 고민해왔고 지원자가 인사이트를 제공한다는 건 기대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렇게 제품 이야기를 통해 내가 비록 경영지원 업무를 하지만 회사의 목표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직무와 관련돼서는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할 수 있는걸 선택했다.
'인사 쪽 경력직 공고를 보면 대부분 100명 이상 규모에서 업무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찾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3년 이내에 100명 이상을 채용하는 게 목표입니다.'
좋은 조직문화를 만들겠습니다. 와 같은 이야기도 좋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차별적인 비전을 제시하고 싶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고 실제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게도
나는 제목과 같이 200:1의 경쟁률을 뚫고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나는 19년 8월 12일에 첫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표 June 과 같이 처음으로 점심을 먹은 날에 궁금증을 못 이기고 '왜 저를 뽑으신 거에요?' 라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뭔가 다 초월한 사람 같아서 뽑았어요' 라는 답을 들었다.
내가 위에 고심하고 준비했던 것들은 사실 별 쓸모가 없었던 것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