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있었던 일
올해 나는 수많은 실패를 겪었고, 그 와중에 인턴으로 일하던 곳에선 내 존재가 배제되는 사건까지 겪게 되었다(이 글 참조). 물론 오해가 있을 것이다. 인턴 중 한 명은 나에게 사과 메시지를 보내면서 사실 몇 명이 간단하게 먹을 생각이었는데 커져 버렸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물론 그렇게까지는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을 수도 있고, 변명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오해를 쌓았을 수도 있다. 만약 내가 이 사건의 제3자였다면 이걸 바탕으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의 당사자이자 피해자였다. 사람이기에 내게 일어난 일까지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돌이켜서 생각해 봤을 때 인사팀에 면담을 요청했던 게 좀 성급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이 술자리에 문제가 있다고 고발하는 것도 안 좋게 비춰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해결하는 것보다 이런 공식적인 문제 제기가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원했던 건 그런 류의 고발이 아니라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문제제기였고 조치였다. 아니, 최소한 이 사안에 대해서 인턴들끼리 다 같이 얘기를 나눌 자리라도 마련이 되길 바랐다. 그러나 인사팀 담당자는 이것을 그냥 인턴 간의 사소한 갈등으로 보고 그런 문제까지 나설 수는 없다고 했다.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것에 대한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있는 듯했다. 인턴들이 경위서를 쓰긴 했지만 그냥 경고성이었고, 심지어 이 과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해서 나에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남은 며칠을 다른 조원들과 함께 좁은 회의실에서 하루종일 함께 있어야 했다. 가끔 마주치는 다른 조원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굴었고(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다) 나 혼자 외딴섬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결심한 나는 인턴 근무 마지막 날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잘못된 행동에 대해 인턴 전원과 인사팀 담당자가 모인 자리에서 직접 말을 꺼냈다. 나는 글쓰기에 비해 스피치는 꽝이다. 어려서부터 그랬고 그래서 글쓰기를 좋아하게 된 것도 있다. 게다가 10명 앞에서 말이라니, 주말 동안 스피치를 준비하고 연습했다. 남들이 보면 비웃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 이 말을 준비할 때까지, 그리고 실제로 꺼내는 그 순간에도 회사를 그만 다니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아니, 나는 정말 절실했다. 절실했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일과,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도 버틴 것이다. 내가 앞으로 계속 다닐 회사니까 이런 식으로 다니고 싶지 않아서 모두 있는 앞에서 얘기를 한 것이다.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니 이딴 식으로 굴지 말라고. 회사를 잘 다니고 싶어서였다. 또, 문제가 될 거였으면 이미 내가 인사팀에 찾아간 순간 끝난 게임이니 여기서 말 좀 더 한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생각도 있었다. 무엇보다 이 말을 하지 않고 떨어지면 앞으로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할 텐데 억울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여러 이유로 갈등이 발생한다. 그 갈등이 때론 일부 사람에게는 배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문제는, 그 상황을 직접 겪는 사람은 이미 소수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이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반감을 살 것을 알면서도 “이것은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침묵할 때, 약자는 더욱 작아지고 힘없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결과적으로 부당함이 은폐되고 문제는 반복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이건 잘못된 일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군가가 다시금 또 다른 배제를 경험할 수밖에 없다.
그날, 인턴들이 다 모여 있는 곳에서 내가 입을 열기까지는 많은 망설임이 있었다.
‘나만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혹시 괜한 일을 만드는 게 아닐까?’
하지만 결국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나 스스로 내 행동이 정당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다면, 누군가에게 부당하다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상대가 수적으로 우위인’ 상황이라면 더욱 쉽지 않다. 그렇기에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밀어붙일 수 있는 내적 확신이 필요하다.
솔직히 말해, 이런 문제를 공론화하면 나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 불편함은 고스란히 ‘나를 향한 거부’나 ‘냉소’의 형태로 돌아올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미움받을 용기’를 감수해야 할까?
그 이유는, 스스로를 존중하기 위해서다.
가만히 있으면 ‘조용히 넘어가는’ 것으로 여길 수 있지만, 길게 보면 내 자신을 계속 깎아먹는 일이 된다. 잘못된 상황에 분명하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으면, 이후에 내가 겪게 될 부당함 또한 당연시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내 스스로도 “원래 이런가 보다” 하고 포기해버린다. ‘사람은 다 똑같아’라는 체념 아래에서 나 자신을 보호하기조차 힘들어진다.
나는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것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건의 전말을 물은 후,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그들이 잘못된 행동을 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고, 부끄러운 줄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의 고민과 용기가 없었다면 난 이미 그 전에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결국 이번 일로 나는 그곳에서 정규직 전환에도 실패했고, 다시 백수가 되었다. 어떤 이는 “괜히 나서서 일을 크게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고, 심지어 나도 그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정규직이 절실한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분명한 건, 적어도 이를 통해 나는 내 존엄을 지켰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모두 친해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본적인 예의와 사회적 규범은 지켜져야 한다. 그래야 누구도 소외되지 않고, 모두가 일할 권리를 동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다. 물론 그 과정을 겪는 동안, 나를 불편해하거나 아예 등 돌리는 사람도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건 내가 지켜야 할 가치와 바꿀 수 없는 일이다.
부당함을 겪었을 때, 내가 그것을 부당하다고 외치는 데는 ‘미움받는 것을 감수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더 나은 관계와 조직 문화에서 일할 수 있도록 문제를 환기하는 첫걸음이다.
세상은 완전히 공평하지 않고, 우리는 언제든 부당함에 맞닥뜨릴 수 있다. 하지만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우리가 ‘이건 틀렸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 불합리는 언제까지나 정당화된 채 그 자리에 남는다. 결국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순간, 미움받을 수 있다는 걸 알아도 감수하는 것—그것이 정말 우리가 지켜야 할 ‘사회인’으로서의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