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스틴 존슨,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
그녀는 작년에 자서전을 한 권 써서 발간을 했다. 올해로 예순여섯. 100세 시대인 요즘에는 아직 젊으면 젊다고 할 수도 있는 나이지만 그래도 정신과 체력이 건강할 때 그녀는 자신의 삶을 정리해보기로 결심을 했다. 자서전에는 그녀의 어린 시절 이야기, 청년시절 이야기, 직장 이야기, 결혼 이야기, 친정과 시댁 식구 이야기, 그리고 남편과 나와 우리 아이에 대한 이야기들이 실렸다. 그렇다, 그녀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어머니이자 그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할머니인, 나의 (시)어머니이다.
그녀의 자서전이 발행되고 가족들이 모두 읽어보았을 때 남편은 내용이 재밌기도 하지만 일부분은 너무 미화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하지만 제삼자(?)인 내 입장에서는 그런 남편의 불만도 편파적인 것처럼 보여서 나는 자서전을 둘러싼 가족들의 팽팽한 긴장감을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녀의 자서전 쓰기는 생전에 장례식을 준비해보는 '아름다운 이별식' 프로그램과 더불어 웰다잉(well-dying)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된 것이기도 했는데,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죽음을 우리 삶의 일부로서 받아들이는 웰다잉 운동은 우리나라에 웰빙 문화가 정착하고 난 뒤에 웰빙도 중요하지만 그를 위해서는 웰다잉 역시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들어오게 되었다.
그녀는 이런 웰다잉 문화를 확산시키는 단체를 조직하는 일을 했다. 그래서 그 자신이 먼저 웰다잉 프로그램들을 솔선수범하여 실천하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자서전 쓰기였던 것이다. 그녀는 우리 부모님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 이후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이다. 그래서 위아래로 형제자매들이 많았고, 그 중간에 끼여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을 애매하게 받고 자랐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유교 사상이 아직도 강하게 남아 있는 경상북도 안동에서 그 시절에 '딸'로 태어남으로써 어쩔 수 없는 성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 부분은 그녀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엿볼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사이기도 했다. 아마 이 책이 100년, 200년 넘게 남아있어 후대에 전해진다면 후손들은 이를 통해 200년, 300년 전의 우리나라 생활상이 어떠했는지 생생하게 전해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록이란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특히 동영상은 매우 효과적인 기록 수단이다. 요즘엔 나를 비롯하여 육아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영상 기록으로 남긴다. 그런데 부모의 영상을 아이들의 영상만큼이나 자주 찍는 사람들은 드문 것 같다. 아마도 좀 어색하기도 하고 낯 뜨겁기도 해서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확률상 그들이 우리보다, 우리의 자식들보다 생의 레이스에서 죽음에 먼저 도착하리란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럼 그들의 삶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기억되어야 하고, 기록되어야 할까.
커스틴 존슨의 <딕 존슨이 죽었습니다>는 나이가 많이 든 아버지(딕 존슨)와 영원한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덜 슬프고자, 상실의 무게를 조금 더 줄여보고자 그의 딸(커스틴 존슨)이 만든 생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주의 : 아래 내용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932년생인 딕 존슨은 정신과 의사로 살다가 은퇴하고 노인성 치매를 이제 막 앓기 시작한 상태이다. 그의 딸이자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인 커스틴 존슨은 동일하게 노인성 치매를 앓다가 몇 해 전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아버지의 마지막은 영상으로 담고자 이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는 딕 존슨이 죽었다는 가정 하에, 딕 존슨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그의 장례식을 마치 실제처럼 준비하고 치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딕 존슨이 죽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설정한다. 길거리에서 떨어지는 컴퓨터를 맞고 사망한다거나 집에서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서 사망한다거나 공사장을 지나가다가 목재에 찔려서 사망한다거나 등등. 그래서 이 영화를 둘러싸고 그들의 친구나 지인들, 촬영 관계자들은 딕 존슨에게 약간의 걱정 어린 우려를 표한다. 정말로 괜찮냐고. 그럴 때마다 그는 웃으며 딸이 자기를 얼마나 다양하게 죽이는지 아냐고 농담을 하곤 했다. 하지만 그의 진심은 딸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런 영화도 찍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녀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알게 된 딕 존슨이라는 사람은 변화에 유연하고 열려 있는 사람이며, 신념을 지키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자신의 신념도 내려놓을 줄 아는 다정한 사람이었기에 이런 영화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상실을 두려워하는 (그에게는 여전히 어리고 여린) 딸의 부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수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의 모습을 보며 나도 이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렇게 죽고 싶다는 마음보다는 죽기 전까지 이런 마음을 가지고 늙고 싶다는 생각을. 그래서 이런 아빠를 잃고 싶지 않아 하는 커스틴 존슨의 다급한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아마 65세 이상 노년층의 가장 큰 걱정은 노인성 치매를 앓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일 거다. 얼마 전 배우 윤여정 님도 인터뷰에서 나이 들어 치매가 가장 큰 두려움이라고 말하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치매가 슬픈 건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거다. 타인에 대한 기억, 자신에 대한 기억, 더 나아가서는 인간으로 태어나 성장하면서 배워왔던 신체적인 기억들까지. 물론 본인은 자신이 기억을 잃고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르지만 그 주변 사람들이 많이 슬퍼하게 될 것이고, 자신의 치매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상처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본인에게도 큰 마음의 짐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기록은 중요하다. 영화에서도 커스틴 존슨은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찍은 영상이 치매가 심각해진 뒤에 자신을 비롯한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멍한 눈빛의 모습뿐이라고 후회 섞인 독백을 한다. 기억력 좋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의 그녀도 자서전을 쓰면서 그 기억을 오롯이 자기만 간직할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자기 자신도 인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한 나약한 육체의 기억력에만 의존하지 않은 채. 나는 이러한 태도가 무엇보다도 겸손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노인과 아이는 돌봄이 필요하다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 아이들은 돌봄을 통해 점점 자라면서 자의식이 강해지고 자신만의 반짝반짝 빛나는 개성을 찾게 된다. 그 모습을 바라보면 그 에너지가 전달되는 것 같아서 함께 기분이 좋아지고 대견한 마음이 든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기능이 떨어지는 노년의 부모를 바라보면 돌봄에 대한 부담감과 슬픔, 안타까움 등의 부정적인 기분이 들기 마련이다. 나의 그녀는 '엄마는 열 명의 아이들을 돌볼 수 있지만, 열 명의 자식들은 한 명의 부모도 돌보기 힘들다'는 말을 하면서 자신이 더 늙으면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알아서 요양원에 들어갈 거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다. 사실 농담은 아닌 것이 그녀는 실제로 요양원을 알아보고 그 비용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오히려 요양원에서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과 즐겁게 지내면서 마지막 여생을 보낼 거라는 구체적인 계획을 우리에게 말해 주었다.
이 영화는 커스틴 존슨과 딕 존슨의 일상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한편, 딕 존슨이 죽고 난 뒤 천국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춤을 추고, 평생 숨기고 다녔던 못생긴 발이 잘생긴 발로 변화하는 등 코믹하면서도 과장된 영화적인 장면들도 병치시킨다. 그리고 딕 존슨이 천진난만하게 연기를 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초코 퍼지 케이크를 아이처럼 퍼 먹는 연출을 통해 경증 치매에 걸린 우울한 노인의 모습이 아닌, 생기 넘치는 노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한 개인의 개성이 나이와 외모에 함몰되지 않고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그저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인 인간이 아니라,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자의식과 개성을 잃지 않은 존엄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딕 존슨을 기억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진짜 같은 장례식을 거행한다. 가상의 장례식에서조차 사람들은 슬픔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이것이 영화이며 실제가 아닌 가짜임을 상기하고자 노력함에도. 그들은 진심으로 딕 존슨을 사랑했으며, 그의 상실을 슬퍼했다. 그래서 이 장례식은, 딕 존슨의 죽음은 그들에게 결코 아름다운 이별로 다가올 수 없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연적인 죽음이며 노환으로 인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아름다운 이별이라고 부르는 것은 결코 그럴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그 슬픔을, 그 상실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감소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담아.
그래서 이 영화는 딕 존슨의 죽음을 미리 연습하고 영상으로 기록하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했으나, 효과적인 측면에서는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아니, 죽음을 위한 심리적인 준비는 처음부터 달성될 수 없는 목표였다. 그저 죽음을 예비하는 차원이었을 뿐 슬픔은 전혀 감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두 배의 슬픔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어차피 진짜 죽음이 닥쳐왔을 때도 그들은 슬퍼할 테니까. 하지만 우리의 곁을 먼저 떠나는 나이 든 사람의 모습을 '기록'하는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이 영화는 너무나도 바람직한 모범을 우리에게 남겨주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아이처럼 기뻐하고 감정을 숨기지 않는 딕 존슨이라는 개성 넘치는 사람이 우리 곁에 존재했음을. 치매 환자, 노인, 할아버지, 뒷방 늙은이가 아니라 여전히 생기발랄하고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한 인간이 삶의 마지막 길에서 춤추고 있었음을 기록한 영화로서 말이다.
그녀는 몇 해 전에 <아름다운 이별식>이라는 것을 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모여서 마치 파티를 하는 것처럼 장례식을 준비했던 것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해보고, 그들의 축복을 받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공개적인 유언을 남기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남편에게 편지를 낭독하는 등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의 생을 살아 있을 때 미리 정리해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나는 아무리 100세 시대라지만 우리가 100세까지 청년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닌 이상, 어느 정도 나이가 됐을 때 이렇게 자신의 삶을 정리해보는 시도가 매우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기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자신의 삶을, 현재를 매우 충실하게 살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는 생각도 함께 말이다.
영화에서 딕 존슨은 현재에 충실한 사람이라 미래에 죽음이 가까이 왔을 때의 모습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커스틴 존슨이 "엄마처럼 (치매가 심하게 진행되어) 소통할 수 없을 때라도 살고 싶다는 말씀이세요?"라고 묻자 딕 존슨은 그렇다고 말하며 "나는 사는 게 좋아."라고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대답한다.
하여, 딕 존슨과 나의 그녀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죽음이 다가올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것은 닥쳐올 이별에 대한 슬픔이라기보단 생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었음을. 삶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감정에 솔직하고 에너지를 발산할 줄 아는 멋진 그녀를 이 글을 통해 기록해 둔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