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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수 Apr 03. 2021

‘나’의 경계를 벗어나려는 사람

크리스 스미스, <짐과 앤디>

그녀는 나의 입사 동기였다. 우리는 최종 합격을 통보받은 뒤 모인 첫 번째 자리에서 금방 친해졌다. 이유인즉슨, 나는 미학을 그녀는 철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 인문학 전공생들은 보통 취업을 위해서 복수전공으로 경제나 경영학을 선택해서 전공이 뭐냐는 질문에 후자를 답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철학 전공에 따로 복수전공이 없었고, 의류학을 부전공으로 했다고 했다(나는 언론정보학을 부전공으로 했는데 우리는 부전공마저 취업과 거리가 멀다는 점까지 동일했다). 우리는 서로의 전공을 알고 나서 웃을 수밖에 없었는데, 취업준비생 중에서 혹은 취업에 성공한 사람들 중에서 철학 전공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격도 비슷했는데, 좋아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잠시도 참을 수 없어하는 점이 비슷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은 미련하게 밀고 나간다는 점도. 그런 부분들이 취업이 되든 말든 끝까지 철학 전공생으로 남고자 했다는 것으로 판명이 났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가까워졌다.

우리가 입사한 회사는 입사 1년 뒤에 서울에서 꽤나 먼 지역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회사에서 제공해준다는 사택을 신청하지 않고, 그나마 그 지역에서 핫한 곳에 월세방을 구해서 한 달 정도를 같이 살게 되었다(한 달 뒤에 나는 퇴사를 했으므로). 한 달 동안 우린 서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서로의 연애사와 가족사와 기타 등등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 대화 중 8할 이상은 풍문으로 떠도는 회사 내의 열애설과 진상 직원들에 대한 욕이었지만. 그러면서 그녀는 직장 생활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직장에 들어가서 밥벌이를 하는 것이 이 나라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일이기에 취업을 하긴 했는데 회사 일이 도저히 자신과 맞지 않더란 것이었다. 물론 직장 생활이 맞는 사람을 찾는 일은 더 어렵지만 그녀는 유독 영혼 없이 일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사실 그녀는 대학을 다닐 때 연극 동아리에서 연극을 했던 사람이었다. 극단까지는 아니었어도 그 동아리 자체가 연극으로 유명한 동아리였어서 그녀는 거기서 연기를 배우고 배우를 꿈꾸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배우라는 것이 누구나 되는 것은 아닌지라 어쨌든 돈을 벌어야 하니까 취업을 했던 건데, 연극 무대에 대한, 연기에 대한, 배우라는 꿈에 대한 미련이 자꾸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서 그녀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그러다가 그녀와 같은 동아리에 있던 후배가 -그 후배는 연기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매진했던 사람이었는데- 숱한 노력과 기다림의 결실로 좋은 감독을 만나 영화를 찍었고, 그 영화가 크게 성공해서 일약 탑배우가 되었다는 현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더더욱 꿈을 포기한 자신의 모습에 상실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는 똑같은 경험은 없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부러움과 후회와 질투와 실망감이 뒤섞인 감정을. 티비에 나온 그 후배의 모습에 그녀가 얼마나 속이 쓰렸을지.

그녀는 결국 내가 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를 나왔다. 얼마 전에 만난 그녀는 프로필 촬영도 하고, 유튜브에 채널을 만들어서 자유연기를 올리며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단역 오디션을 보러 다니면서 연기에 대한 불을 다시금 지피고 있었다. 연기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배우라는 것이 대체 뭐길래 정년까지 보장된 직장을 그만두게 만든 걸까. 나는 그게 늘 궁금했다.




<짐과 앤디(Jim and Andy)>는 할리우드 배우인 짐 캐리가 희극 배우인 앤디 코프먼(Andy Kaufmann)이라는 실존 인물을 연기한 <맨 온 더 문(1999)>의 촬영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주면서 자신의 연기 인생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주의 : 아래 내용은 영화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짐 캐리는 <맨 온 더 문>으로 제57회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받게 되면서 <에이스 벤추라(1994)>, <마스크(1994)>, <덤 앤 더머(1994)>로 대표되는 성공적인 짐 캐리식 코미디 연기에 늘 혹평이었던 영화 평론가들의 시선을 180도 바꾸어 놓는다. 짐 캐리는 우스꽝스러운 표정과 과장된 성대모사만 할 줄 아는 것이 아니라 <트루먼 쇼(1998)>, <이터널 선샤인(2004)>처럼 무겁고 어두운 연기도 소화가 가능한 배우였음이 증명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 바로 이 영화였었다.

사실 나는 <맨 온 더 문>을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앤디 코프먼이라는 희극 배우도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짐과 앤디>를 시청하는 데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앤디 코프먼을 기리는 영화도, <맨 온 더 문>의 촬영 뒷얘기를 단순히 짜깁기해서 보여주는 영화도 아닌, 짐 캐리라는 배우의 연기 철학을 다루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에서 짐 캐리는 사람들은 카메라 밖에서 영화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맨 온 더 문>의 촬영 비하인드 컷을 영화로 만드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 카메라에 담긴 인위적인 영상들을 편집하고 다듬어서 하나의 완성품으로 제작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완성품에 담기지 못할 비하인드 컷들을 오히려 영화로 만든다는 것, 즉 메이킹 필름 자체가 영화가 된다는 발상은 기존의 생각을 한번 더 비틀어서 영화의 존재 방식 자체를 다룬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이미 <트루먼 쇼>에서 짐 캐리가 예언처럼 수행한 방식이기도 하다.

<맨 온 더 문>이라는 영화가 이렇게 비하인드 컷까지 모아서 다큐멘터리 영화로까지 제작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앤디 코프먼이라는 실존 인물에 빙의되다시피 한 짐 캐리의 연기 때문이었다. 짐 캐리는 단순히 앤디 코프먼을 따라 하거나 모방하는 식으로 연기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만의 방식으로 실존 인물을 재해석해서 독창적으로 구현해낸 것도 아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실존 인물과의 동일시, 곧 동화되는 것이었다.

사실 짐 캐리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를 흉내 내고 성대모사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던 사람이었다. 유명해지기 전에 출연한 쇼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가 사람들을 웃기는 방식은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처럼 끊임없이 말로 웃기는 타입이 아니라 얼굴 표정과 목소리의 변화, 움직임의 모사 등을 통해 유명인을 똑같이 흉내 내는 타입이었다. 이런 방식이 그가 가진 재능이었고 그가 가장 편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어쩌면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고 했을 때 그를 완벽하게 따라 하는 것을 넘어 아예 그 인물이 되어야만 하겠다는 발상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카메라 '앞'에서 뿐 아니라 그 '밖'에서까지 아예 앤디라는 인물이 되어 있었고, 이 어처구니없는 발상을 처음에는 영화감독뿐 아니라 수많은 제작진과 관계자들이 불편해했으나 종국에는 그를 아예 앤디로서 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앤디의 가족들까지도.

그런데 여기서 더 복잡해지는 것은, 토니 클리프턴이라는 존재에 의해서이다. 토니 클리프턴은 앤디 코프먼이 살아 있을 당시에 만들었던, 오늘로 치면 '부캐' 같은 인물이다. 물론 부캐보다는 좀 더 무거운 느낌인데, 토니 클리프턴이라는 캐릭터는 매우 오만하고 무례하며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 위한 행동들을 일부러 하는 듯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토니는 앤디처럼 웃긴 사람이 아니었으며 진지하게 오만불손하고 경거망동을 일삼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캐릭터까지 소화해야 하는 짐 캐리는 그 행동의 이유까지 생각하고 토니가 되어야 했다. 즉, 짐 캐리는 앤디 코프먼뿐 아니라 앤디 코프먼이 '연기'했던 토니 클리프턴이라는 인물까지 이중으로 '연기'를 했던 것이다. 게다가 얼마나 실감 나게 토니가 되었던지, 촬영 현장에서 짐 캐리는 <맨 온 더 문>을 연출한 거장인 밀로스 포만 감독을 질리게 했고, 촬영 스텝들도 실제로 그를 싫어했던 것 같다. 

짐 캐리, 앤디 코프먼, 토니 클리프턴이라는 세 명의 인물을 품고 있어야 했던 짐 캐리가 연기를 하면서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었던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그가 출연한 일련의 영화들은 마치 짠 듯이 배우가 캐릭터에 완전히 빙의되어 자신이 누군지를 헷갈려할 정도로 정체성에 혼란이 온 영화들이었다. <마스크>, <맨 온 더 문>, <트루먼 쇼>,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는 영화인 <이터널 선샤인>까지. 

하지만 이런 류의 정체성 고민을 하는 것은 배우뿐만이 아니다. 그는 영화 업계뿐 아니라 월 스트리트도 그렇고, 모든 부분에서 우리는 연기를 한다고 말한다. 사무실에 출근해서 직장인 모드로 변신하고, 승자처럼 보이기 위한 연기들을 한다고 말이다. 실제로도 나의 그녀는 연극을 전공했던지라 이런 순간들을 직장 안에서 재빠르게 캐치를 해내곤 했다. 그녀는 입사 초창기에는 왜 사람들이 저렇게 말을 하지? 왜 저런 행동들을 하지? 왜 전화를 저딴 식으로 받지?라고 의아해하며 그들과 섞이지 않는, 제삼자의 눈으로 그들을 관찰하곤 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모두 연기를 하고 있었던 거였다고. 계약서 상 을의 위치에 있는 위탁 업체의 사장에게 굳이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할 필요는 없는데도 굳이 싸가지 없이 구는 과장님도, 중앙정부에 속한 고위 공무원에게 그렇게까지 굽실거릴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허리까지 굽신굽신 해대는 팀장님도,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할 뿐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뒤로부터 그녀는 직장 생활을 오히려 즐기는 듯했고, 본인도 본인에게 주어진 배역에 아주 충실하게 임했다. 물론 그 배역이 전형적인 직장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캐릭터로서 스스로에게 부여한 것이었긴 했지만. 

그렇다면 연기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길래 배우가 자신의 정체성을 내던져버리기까지 하면서 몰입하는 것일까. 배우가 관객 앞에서 자신이 아닌 주어진 배역으로서 연기를 하는 연극이라는 예술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당시의 연극은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라는 경험을 선사하는 '비극'의 형태였고, 이 비극의 원형은 '시'였다. 그런데 오늘날의 시처럼 문자로 된 순수 문학이 아니었고, 고대 제의와 연결된 것으로서 그 자체로 춤이자 연극이자 문학을 모두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예술로서의 시였다. 고대 그리스 시대의 시인들은 문자가 아니라 음성언어로 시를 읊어주는 음유시인이었는데, 그들의 시는 보통 '뮤즈' 여신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노래한다는 구절을 시의 서두에 붙인다. 즉, 시는 시인이 자신의 이성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뮤즈 여신으로 빙의가 됨으로써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채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는 플라톤으로 하여금 시인 추방론을 제기하게끔 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시인은 뮤즈의 영감을 받은, 이성적 인간이 아닌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이고, 이런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시의 길로 유혹하기 때문에 추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앤디와 앤디가 연기한 토니로 아예 빙의가 되어 연기한 짐 캐리는 정상에서 벗어난, 연기의 테크닉이 아닌 영감에 사로잡힌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나'를 벗어난 상태인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모두 벗어버린 채 나의 너머에 있는 상대방이 되어버리는 것. 하여, 이런 행위는 정상성의 범주에 속한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종국에는 그들이 눈물로 환호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이 행위는 진심이기 때문이다. 가짜가 아니고, 모방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자 한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이런 유혹이 나의 그녀를 연기의 길로 다시 이끌었다.




영화의 말미에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냐는 제작진의 질문에 짐 캐리는 우주에 있는 작은 의자 위에 있다고 시인처럼 말한다. 그가 우주로 간 까닭은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추상의 굴레들을 다 놓아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지어준 이름, 그 이름대로 살아라 라는 요구들, 캐나다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캐나다인이 된 사람, 사회에서 정상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진 추상의 규칙들과 그 규칙들을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의 불편한 숙명을 벗어버리기 위해서. 하여, 플라톤의 이성의 세계에서 추방된 시인은 우주로 갔다. 시인은 우주에서 작디작은 파란 별의 지구를 비웃으며, 지구인들이 구축한 추상의 세계를 대체할 다른 세상을 만들기로 했다. 그것은 그 자신이 바로 우주가 되는 세상. 그렇게 될 수 있는 세상.   

나는 그녀를 생각하면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라는 노래가 떠오른다. 그녀는 도망갔다, 정상의 기준에서 비정상의 길로. 정상과 달리 찬란하고 날카로우며 불편하고 아름다운 길로. 나는 그런 아름다운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정상의 경계에 여전히 묶인 채로 이 글을 쓴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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