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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ortbus Nov 01. 2022

성폭력 피해자는 '평판'까지 관리해야 한다.

: 그래야 겨우 학계에서 퇴출당하지 않는다.

이 주 전, 나를 아껴주시는 교수님을 오랜만에 뵈었다. 그냥 점심이나 한 끼 하자는 반가운 말씀.

교수님은 "연구실적을 빨리 내어 안정된 자리를 찾아야 할 텐데..." 하시며 걱정해 주셨다.

그러다가 내가 가해자를 신고한 올해 3월부터 무슨 일을 겪었는지, 왜 연구실에서 자리를 빼게 되었는지, 왜 신경정신과에 다닐 수밖에 없었는지 등을 말씀드리게 되었다.

(이 날 이후 약 열흘 간 눈물과 불면, 흉부 통증으로 고통을 받았다. 무언가, 어딘가에 있는 트라우마의 버튼이 눌러졌었다 보다.)


교수님은 처음엔 놀라시고 나중엔 심각한 표정으로 들으시더니 현실적인 말씀을 하셨다.

학계에서는 아무리 억울해도 일단 구설수에 오르면 무조건 어린 사람이 손해라고. 사람들은 누가 잘했는지 잘못했는지, 일의 원인과 결과가 무엇인지를 따지지 않는다고.

구설수에 오르면, '둘 다 문제가 있었겠지',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데...'라는 식으로 잠깐의 호기심으로 사건을 소비하고는 관련자들은 '걔, 예전에 성 관련 문제 있던 애'라는 오명만 남긴 채 문제는 증발해 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안정된 자리와 권력, 사회적으로 좋은 평판을 갖고 있는 관련자는 큰 타격을 받지 않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평판이랄 것도 갖고 있지 않은 피해자는 치명적인 오명만을 뒤집어쓰게 될 거라고. 이때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즉, 아랫사람인 성폭력 피해자가 2차 가해에 의해 학계에서 그나마 버려지지 않으려면 주변인들에게 '좋은 평판'을 쌓아야 한다는 말인데...


성폭력(A)은 피해자의 인성이나 인격(B)과 무관하게 발생하지만,

피해 사실이나 2차 가해(A의 결과)의 진위, 그리고 피해자의 사회적 생명은 피해자의 인성, 평판(B의 결과)에 따라 평가받는다.

즉, A와 B가 무관한데, A의 결과의 진위가 B의 결과 의해 판가름 난다는 것이다.


이 단순한 오류가 만약 논문이나 연구보고서의 가설이라면... 더 읽지도 않고 던져 버리실 분들이.. 실생활에서는 그렇게 하신다ㅎㅎ


결국 피해자는... '평판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노력까지 해야 하고 그렇게 되어야 겨우 신뢰를 얻을 수 있고... 학계에서 버텨낼 수 있다. 그런데 그 평판이라는 것이.. 학계에서는 10년, 20년은 쌓여야 한다는데... 이게 참...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다. 10년, 20년 경력이 있는 사람이 성폭력을 당할 확률과 신진학자가 피해를 입을 확률은 비교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힘없고 경력 짧고 인맥 없으면 억울해도, 자신의 것을 빼앗겨도, 자신에게 무언가가 불합리한 일이 발생한 것을 알아도 입 다물으라는 얘기다.


나는...?

당신이라면...?

...

그러고 보니 2000년대 초반에 내가 다니던 대학에서 교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는데, 한 여성 페미니스트 교수님께서 잘 알지도 못하던 여학생 피해자를 위해 애써주시던 일이 기억난다.

그땐 그저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멋있고 고마운 것은 당연하고 어마어마하게 대단한, 훌륭한 분이셨구나...싶다.


그 분은 하물며 가해 남성 교수가 대학 동창이었는데도 피해학생의 편에 서 주셨고, 재판장에서 가해교수에게 유죄 판결이 나자 그와의  인간적인 관계 때문이셨는지 눈물을 훔치셨었다.


지금은 은퇴하셨는데...지금도 학계에 그런 분 계시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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