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항의가 받아들여지고 나서부터 내가 느끼는 감정은 '개운+오싹'이라고 지난번 글에서 얘기했었다.
이때 '오싹'한 감정은 나의 항의로 인해 계획한 일이 무산되어 직접적으로 화가 잔뜩 났을 그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다. 물론 나에게 물리적으로 위해를 가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뭔가... 나보다 힘이 센 사람들이 나의 결정과 행동으로 인해 당혹감을 느끼고, 화가 나고, 나를 원망하고 욕하고... 그런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니까.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은, 특히 연말이고 내가 새로운 공간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어 더욱 그런 것이겠지만, 주변 분들의 친절한 조언이 나를 쫄게 만든다. 비록 그분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라 해도.
"한국에서 OO학 하는 사람들은 한두 다리만 건너면 서로서로 다 알아."
"학계라는 곳이 참 좁아. 그러니까 조금 부당한 일 당해도 좀 참을 줄 알아야 해."
"인생 기니까... 하루 살고 말 거 아니잖아? 좀 참고 평판을 쌓는 게 더 중요해."
"이 바닥에서는 소문 금방 나. 누가 어디서 뭘 하는지 금방 다 알아."
"OOO교수 어떻게 알아요? O박사(=나)를 안다고 하던데?"
아무 일이 없었다면, 이런 말씀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을 것이다. 그냥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라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들었을 것이고 내 귓가에 남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서 무슨 말을 들으셨나?'
'일부러 나에게 말씀하시는 건가?'
'뭔가를 떠 보시는 건가?'
'OOO교수님이 설마 그 일과 관련된 말씀을 하시진 않았겠지?'
이런 생각들이 들면서 움츠려 들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생각에 도달할 때도 있다.
'내가 잘못 결정한 건가? 참았어야 했나?'
...
물론, 이 질문이 내 안에서 올라올 때마다, 나 스스로의 대답은,
'아니야. 나는 업무와 관련하여 '좀 부당한' 일을 겪은 것이 아니라 나의 정체성과 인권이 훼손당하는 피해를 입은 거야. 인내심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인내의 임계치에 도달하여 정당하게 항의를 하는 용기를 낸 거야.'
그래서 난 여전히 내 결정과 행동에 후회가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쫄면서 지내고 있는 것도 맞다.
조금 과장하자면, 내가 일하는 언저리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는 그 사람들의 이름, 소식, 이야기들 속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어디에도, 누군가에게도 책 잡히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지낸다.
성추행, 그리고 2차 가해 피해자로서 난 요즘 이렇게 지낸다:)
참, 혹시라도 저를 만나고 싶은 분들, '허들을 넘는 여자들'의 작가들을 만나고 싶은 분들은 이쪽으로 신청해 보세요. 많은 인원은 아니더라도... 함께 모이는 자리가 있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