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921
은행은 반숙이다. 철모르고 푸르뎅뎅하다. 설익은 알맹이를 떨군다. 개미는 천하장사다. 구멍 난 낙엽을 업는다. 집채만 한 이파리를 옮긴다. 비둘기는 허수아비다. 외발을 절룩절룩 절어댄다. 눈망울이 멀뚱하다. 위태로운 바람을 맞는다. 날개를 짝짝이로 뻗는다. 유모차가 구른다. 유아는 없다. 강아지를 태운다. 털 뭉치는 꼬부라진다. 혀를 축 내민다. 행인을 본다. 운동화를 뒷짐 진다. 흙길을 맨발로 거닌다. 은행이 밟고, 개미가 밟고, 비둘기가 밟고, 유모차가 밟은 길을 맨발이 밟는다. 발자국 소리를 듣는다. 두근두근. 박동 같다. 흐드러진 금목서를 찾는다. 풍문을 줍는다. 창경궁 대온실에 한 그루 피운대. 야심 차게 향한다. 달랑 화분이다. 듬성듬성하다. 비실비실하다. 만 리 밖 내음 흩뿌리지도, 서울 땅에 맥 추리지도 못한다. 코를 박는다. 숨을 들이켠다. 분자를 샅샅이 탐한다. 가까스로 포착한다. 엉성한 계절이다.
조금 설레는 점은, 머지않아 올해를 맺는 것.
열두 달을 성글게 훑는다. 시월에 시작해 삼월에 끝난 문장, 사월에 시작해 구월에 끝난 문단. 추분과 춘분이 맞물린다. 이십육 년 지기가 반년 시차 둔다. 현이 지은 하루에 혜가 주석을 단다. 시작은 가벼웠다. 당신께 빈 수첩을 전했다. 당신은 매일 조각을 채웠다. 되돌려주었다. 한 해 반쪽이 손바닥에 톡 떨어졌다. 한 줌은 한껏 묵직해졌다. 고심했다. 당신을 어떻게 정확히 해석할까. 결론지었다. 글감 삼고자. 답신을 썼다. 당신은 우리를 몽땅 읽게 생겼다. 토막글에서, 시에서, 기행에서, 단편에서, 연작에서, 편지 아닌 편지까지. 투명해져 도래하니 일상성이다. 허풍 없는 나날이다. 흐르는 시간에 찰나를 건지려 발버둥 쳤다. 이제 그만 자연히 둔다. 변함없이 담담히, 하루하루 살아내면 충분하리라. 유려하지도, 유용하지도 못한. 무려하고, 무용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끝을 말하는 자세를 배운다. 끝까지 함께해 고맙다. 이 작은 수첩을 다 썼다.
240317
1. 변함없이 담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나가면 충분하다고 생각함.
2. 조금 설레게 되는 건 지금은 봄, 곧 여름이 온다는 것.
3. 이 작은 수첩을 다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