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영 Jan 09. 2024

에세이 느낌을 살리는 낱말

교정교열가는 무엇을 고칠까?

컴퓨터를 할 수 있는 도서관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서어나무 님이 쓴 글과 고민이 담긴 편지를 다시 꺼내봤다. 첫 번째 글은 에세이 느낌이 부족하고, 두 번째 글은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자세를 바로하고 원고를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고쳐야 할 맞춤법이나 틀린 글자, 띄어쓰기는 없었다. 그다음은 첫 번째 글에서 어느 쪽에도 어울리지 못하는 글월에 빨간색을 입혔다.  


「때로는 이런 태도가 괜찮은 것인가 싶었지만 퇴소 전 보육원에서 들었던 선배 언니들의 녹록지 않은 퇴소 후 삶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던 바, 마음을 놓을 곳이라곤 이뿐이라고 확신했다.」

 

한 글월이 너무 길다. 긴 글을 견디지 못하는 요즘 사람들에 맞춰보면 더욱 그렇다. 물론 길어도 물 흐르듯 막힘없는 글이 있고, 그래야 글맛이 살기도 한다. 그러나 위 글월은 턱턱 걸리는 낱말들이 있어 읽기가 사납다.


‘태도’, ‘퇴소’, ‘전’, ‘후’, ‘녹록’, ‘확신’. 대부분 한자말이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건너왔거나 두 나라 말법을 따라 우리말처럼 써온 낱말들이다. 이 낱말들은 우리글에 섞이면 밟고 올라서는 느낌을 준다. 별뜻도 없는 것들이 중요한 내용을 다 가려버린다. 소리 내어 읽어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글은 모난 데 없이 둥글어 서로 참 잘 어울린다. 나는 다음과 같이 고치고 파란색으로 칠했다.  


때로는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었다. 하지만 보육원 바깥 생활은 만만치 않다고 보육원 언니들한테 수없이 들었기 때문에 다른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한 가지 더 눈여겨본 것은 ‘~들었던 바’ 같은 말투나 위 글에는 없지만 ‘이에 따라’, ‘즉’ 같은 보조사다. 서어나무 님의 글은 아픈 일도 담담하고 따뜻하게 풀어낸 글이다. 그런데 저런 보조사가 끼어드니 갑자기 논문 글 같았기 때문이다. 다음 글도 마찬가지다.

    

「퇴소 후 우리 같은 부류의 첫 감상은 내가 생활해 온 보육원과 실제 사회의 이질감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그동안 굳어졌던 자신의 가치, 삶의 태도, 생활 습관 등을 모두 수정해야 할 정도다.」


위 글월은 외국 문헌을 본보기 삼아 쓴 논문 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번역 말투다. ‘퇴소’, ‘부류’, ‘이질감’, ‘인식’, ‘자신’, ‘태도’, ‘습관’, ‘수정’ 같은 한자말도 눈에 띈다. ‘태도’나 ‘습관’은 누구나 자주 쓰다 보니 우리말로 굳어졌다 할 수 있지만, 주변에 한자말들이 많으면 이마저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낱말 하나하나가 에세이 느낌을 살리고 죽이기도 한다니, 참 재밌다. 이번에는 아래처럼 고쳐보았다.


「보육원을 나와 처음 맞닥뜨리는 건 보육원과 바깥 사회의 ‘다름’을 보고, 느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동안 굳어진 나의 가치,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 생활 버릇 따위를 모두 바꿔야 할 정도다.」 


좋은 글은 읽는 사람이 곧바로 알아먹는 글이다. 이러면 생각하게 하는 글이 좋은 글 아니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생각은 어떤 내용을 담은 글인지 되짚어볼 때 따라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한참 헤아리게 하는 글이 아니다. 다음 글은 어떨까?


「‘자립’이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의 쓸모를 의심할 만큼 지극히 개인의 태도와 가치나 판단이 반영되는 철학적 해석이 필요한 영역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립준비청년의 자립은 천편일률적이다.」 


어쩌면 학력이 높을수록, 이런저런 어려운 책을 읽었거나 관공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이게 무슨 소린지 금방 알 수도 있겠다. 그러면 아래처럼 고친 글은 어떻게 보일까?

    

「사전에 풀이된 ‘자립’이라는 뜻이 탐탁잖다. 내가 겪으며 알게 된 ‘자립’은 한 사람의 태도와 가치, 생각이 녹아든 해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립 준비 청년에게 자립은 모두 똑같은 틀로 찍은 것처럼 엇비슷하다.」


못 배운 사람, 무식한 사람이 쓴 글로 보이려나? 나는 오히려 더욱더 쉽고 깨끗하게 쓸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는 내가 답답할 뿐이다. 그동안 너무 어렵게 말하는 연습, 어렵게 쓰는 연습만 했다. 다들 그렇게 가르쳤고, 그걸 배워야 우스운 꼴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초등학교 3학년일 때 친구들에게 한 말이 생각난다. 모둠 과제 때문에 친구들이 맡은 일을 얼마나 했는지 물어야 했다. 그때 선생님이 이쪽으로 다가오시길래 우렁차게 말했다.


“너희들, 얼마나 진전했어?”


그즈음 오빠가 읽던 책을 나도 읽는 척하는 재미(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에 빠졌다. 나는 한 책에서 회사 이사쯤 되는 사람이 아래 직원한테 “얼마나 진전은 있었는가?” 하며 재촉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런데 애들이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웃음을 꾹 참는 표정이기에 속으로 얼마나 쩔쩔 맺나 모른다. ‘진전이 아니라 전진인가?’ 하고.


서어나무 님이 겪은 일들, 지금도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나는 모른다. 아마 많은 사람들도 자립 준비 청년들이 어떻게 사는지 모를 거다. 그래서 더욱 그가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들이 꾸밈없는 글로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읽고 느낄 수 있는 글로 말이다.


우리말을 더 잘하고 싶어서 선택한 일이지만, 남의 글을 손대는 일이라 늘 조심스럽다. 나 때문에 글쓴이의 색깔이 다 뭉개지면 어떡하나. 나 때문에 글쓴이의 생각과 느낌이 지워지면 어떡하나. 냄샛길이 지워지면 길을 잃어버리는 강아지처럼 나는 계속 돌아보며 글쓴이의 냄새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이제 서어나무 님의 두 번째 글을 살펴봐야겠다.


작가의 이전글 작가님, 제가 할까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