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 원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된 곳

by 바람바람바람

싱가폴의 끝자락 어디에선가, 주소마저 없던 매립지에서 아침 일곱시 부터 밤 열한시까지 쉴틈없이 일하는 나에게 회사에 대한 소속감과 금전적인 보상은 있었지만, 빛나는 나의 청춘은 색이 바라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나에게 빛나던 청춘이 있긴 했던가?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교에서도 학업과 미래라는 걱정 때문에 마음놓고 놀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처음에 싱가폴로 발령날때만 해도, 책상에 앉아서 이런 상상을 했다. 내가 어두운 파티장에 걸어들어가면, 별빛 같은 작은 조명들이 하나, 둘씩 켜지고... 내가 바에 앉으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멋진 금발의 남성이 어디에선가부터 다가오는 장면말이다.


하지만, 나의 현실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나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책상 앞에서 일, 일 그리고 또 일을 할 뿐이었다. 게다가 사무실에는 싱글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사무실에서의 로맨스는 꿈조차 꿀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페이스북에서 탄종파가에서 열리는 주말 살사 클래스를 발견했다. 시간대도 일요일 오후라 적당했고, 무료하기 짝이 없었던 내 인생에 조금의 변화가 생기는 자체가 좋았던 것이다. 금융업 종사가들이 많이 일하는 탄종파가는 싱가포르의 최중심가, 내가 일하던 변두리 건설현장에서의 거리는 32km... 자가용을 몰지않는 한, 한 번에 갈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그까지 가는 시간과 거리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살사 클라스가 있는 날이면, 나도 비로소 차가운 도시의 여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교통수단이라고는 영 찾아볼수 없는 투아스의 한 버스 종점에서 방글라데시 노동자들이 꽉 차있는 버스를 타고, 분레이 인터체인지에 도착할때 까지는 미지의 세계를 헤매는 모험가였고, 분레이에서 지하철로 갈아타면서 지하철의 중국계 인파에 묻히면, 마치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가는 평범한 여성이 되면서, 고층건물이 즐비한 탄종파가에 도착하면, 비로소 차가운 도시의 여자가 된 것같은 기분을 만끽하는 것이다.


살사 클래스는 제법 재미있었다. 남녀 비율이 비슷하게 맞는 클라스 분위기도 좋았고, 생각없이 몸을 리듬에 맞기는 기분도 좋았다.

한 두달 쯤 클래스에 나가기 시작했을 때인 것 같다. 평소에 꽤 매력적으로 생겼다고 생각했던 여자 한명이 다가오더니, 다음주 금요일에 계획이 있냐고 묻는 것이다. 물론, 나에겐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글쎄...라고 머뭇거리자, 그녀는 금요일 저녁에 자기 생일 파티가 있으니 차이나 원으로 오라는 것이다. 그녀의 번호를 저장하면서야 그녀의 이름이 보우인 것을 알게되었다. 그 당시 나는 싱가폴에 도착한지 정말 얼마되지 않을 때였고, 회사에서 일하는 것 이외의 유일한 여가시간이 살사댄스 클래스였다. 싱가폴에서 관광 겸, 동료들하고 돌아본 곳이 마리나베이가 다 였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쿨한 척, 이렇게 물었다. "차이나원이 어디에 있는 거지?" 그녀는 "클락키에 있잖아, 그럼 다음주 금요일 10시에 봐."라고 말했다. 클락키는 누구나 알아야되는 장소인 것 같았고, 차이나원 또한 클락키에 가면 그냥 보이는 장소인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잘 모르는 사람에게 초대된 적도 처음이고, 거기다가 생일파티라니... 갈까말까 망설이던 나는 모험을 해보기로 했다.


금요일 9시에 퇴근을 하고, 콜택시를 불렀다. 클락키에 거의 다 도착할 즈음, 택시 기사에게 물었다. "차이나 원이 어디에요?" 기사는 멍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클럽 중 하나겠지. 여기 많잖아." 이러고는 택시정류장에 나를 내려줬다. 난감했다. 진짜 아무나 잡고 "차이나원이 어디에요?"라고 물어서 들어가야되는 웃긴 상황이 된 것이다. 구글맵을 켜서 따라가보기면 안되냐고? 그땐 2009년이었고, 스마트폰은 커녕, 와이파이를 위피라고 읽던 시절이었다.


우여곡절끝에 차이나 원에 도착해서 보니, 차이나원은 강가를 따라 있는 한 건물의 2층에 있는 클럽이었고, 입장을 하기 위해선 1층부터 계단을 따라 줄을 서야했는데, 줄은 꽤 길었다. 게다가 클럽인데, 여자 혼자서 줄을 서 있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았다. 침착해야 해. 쿨하게 행동해야돼. 여기서 어리숙해보이면 더 웃겨보일꺼야...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줄을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줄 서있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입장료를 내고, 바운서의 매서운 눈초리를 지나 드디어 차이나원에 진입했다.


혹자는 차이나원을 클럽이라고 하고, 혹자는 차이나원을 바(bar)라고 할 것이다. 대학교 졸업후, 동기들과 아주 어설프게 나이트클럽을 한번 가본 게 다인 나로써는 차이나원을 클럽이라고 인지하지 않았다. 어쩜 금요일 10시는 아직 이른 시간이기 때문에 한산해서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밖의 줄은 꽤 길었지만 내부는 제법 한산한 편이었다. 나는 그냥 자연스럽게 둘러보기로 했다. 암만봐도 내가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딱 정시에 도착한 것일 수도 있기에, 바에서 병맥주 하나를 시켰고, 바에 앉아서 보우에게 전화를 해봤다. 신호소리가 오랫동안 들렸다. 십분 간격으로 두세번 정도 더 걸었는데 여전히 그녀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난감했다.


11시가 다 되어 가면서 사람들이 조금씩 붐비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도 없는 곳에서 혼자서 계속 있기도 곤란했던 것이, 더 이상 아무도 바 앞에는 앉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춤을 추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그렇다! 나는 클럽에 혼자 온 여자였던 것이다. 게다가 나의 주량은 맥주 반병이었다. 여유있게 또 다른 맥주를 시켜서 앉아서 마시는 척만 하기도 뭣했다. 속으로 어떡하지 어떡하지를 수천번도 넘게 고민한 다음,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금요일 밤 좋은 구경한 셈 치고 돌아가는 걸로 말이다. 그때 옆에서 갖 맥주컵을 받은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저기, 누구 기다리는 중?" 이것은 정곡을 찌른 질문인것인가, 아님 그냥 상투적인 문구인가... 나는 그냥 아무렇지않은 듯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응, 친구랑 만나기로 했는데, 연락이 안되네...그냥 집에 가려고..." 그 남자는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금요일 밤에 친구한테 바람맞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아직 11시도 안됐어! 집에 돌아가기엔 너무 아깝잖아! " 그러더니 나를 끌고 차이나원 내부를 한바퀴 돌아줬다. 알고보니 구석진 곳엔 조용하게 이야기할만한 곳들도 있었고, 여기 온 사람들은 춤만 추고 술만 마시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구를 치는 사람도 있었고, 다트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면서 수다를 떠는 무리도 꽤 보였다. 나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끼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내 이름은 라지야. 괜찮으면 나랑 앉아서 이야기하면서 시간보내자."라고 하는 것이다.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난 취하지 않아서 사리분별이 가능한 상태였고, 말을 거는 이 남자도 그닥 나빠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말하면 들이대는 클럽남 같이는 보이지 않아서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고보니, 나는 어수선한 차이나원에서 쭈뼛쭈뼛 병맥을 마시고 있었고, 내가 입고 있는 옷은 클럽에 어울리는 옷도 아니었다. 청바지에 자켓, 그나마 힐을 신은게 천만다행이었다. 친절하게도 나에게 말을 걸어준 라지는 내가 상상속에서 꿈꾸곤 했던, 금발의 외국인이 아니었다. 그는 인도계통에 키도 작고, 얼굴 마저 못 생긴 남자였다. 내가 라지와 무슨 로맨스가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그는 그날 나를 구해준 고마운 은인이긴 하지만, 그는 늘 그냥 아는 친구일 뿐이다. 최근에 링크드인에서 친구신청을 해서 조용히 거부를 누른 사이라고나 할까?


그 이후로 클락키는, 그리고 차이나원은 내 싱가폴 생활의 활력소가 되는 장소가 되었다. S대리는 내가 클럽에 미쳐서 남자들을 꼬시고 다닌다는 헛소문을 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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