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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름이가기전에 May 04. 2023

껍데기의 삶

알맹이만 남고

연휴를 앞둔 목요일 오후 다섯 시. 네시 반 이른 퇴근을 하고 치과로 향했다. 치과 예약은 여섯 시 반. 일찍 가면 일찍 진료를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담당 선생님이 저녁을 드시러 나갔단다. 그래서 주어진 한 시간이 좀 넘는 자유시간. 강남 한복판 임대료가 비쌀 글로벌 패스트푸드점에서 버거와 맥주를 마시고는 글을 쓴다. 치과 진료 앞두고 맥주 먹어도 되는 건지 살짝 걱정되지만 걱정은 언제나처럼 고이 접어 나빌레라.


분명 선배들이 아이를 낳게 되면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해질 거라고 했건만, 아니 실제로 육아휴직 중 아이와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시절 나는 얼마나 혼자 조용히 활자를 읽고 쓸 시간을 갈망했던가. 근데 왜 나는 이곳에 앉아 아기 영상을 들여다보고 있는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버거를 한입 가득 베어 먹는다. 훈연된 베이컨의 풍미가 입안에 들어선다. 비싸기만 한 라거는 빈정을 상하게 했으나 그래도 버거집에서 맥주를 파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 멍하니 강남대로를 오고 가는 사람들을 본다. 다양한 인종과 세대가 뒤섞인 모습이 새삼 놀랍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표정에 미소가 없다. 그냥 빨리 가서 아기를 안고 싶은데 치과 진료를 하릴없이 기다리는 이 시간이 야속하다.


나는 껍데기라서 마알간 알갱이가 없어 축 쳐져있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열면 아기가 티라노사우르스처럼 좌우로 몸을 기우뚱하면서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하루종일 나만을 기다린 것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품 안을 파고든다. 손을 닦지 않은 나는 두 팔로 아기를 안고 얼굴을 비빈다. 오직 이 순간만을 위해 하루를 산 것만 같다. 아니 일생을 살아온 것만 같다.


“껍데기 왔다. 껍데기”


그런 우리를 보며 어머님은 웃으며 말한다. 제주에서는 엄마를 껍데기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홉 달을 배에서 품었던 동글동글한 알맹이가 세상 밖으로 나와 데굴데굴 구른다. 눈밭에 눈송이처럼 데굴데굴 구르다가 점점 커진다. 그 눈송이에게는 사탕봉지 같은 껍데기가 있다. 알맹이 없이 쭈굴쭈굴한 그 껍데기는 알맹이를 쏙 안고는 다시 팽팽하게 모습을 찾는다.


어머님이 껍데기라고 나를 부를 때면 나는 이런 상상을 하고는 한다. 그리고 아기를 안은 이 순간 나는 온전해지는, 다림질한 것처럼 매끈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혼자 맛있는 음식을 먹는 지금 나는 그다지 기쁘지 않나. 축 쳐졌나.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어서 집으로 가 주섬주섬 알맹이를 속에 넣고는 온전한 개체인 척하고 싶다.


껍데기는 어서 집에 가라.

알맹이 만나러

껍데기는 어서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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