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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eree Baik 애리백 Mar 08. 2020

숲 속에서 마주친 두 사람

느슨한 북클럽_이야기의 시작

찬란한 스위스의 가을이었다. A 회사에서  컨퍼런스를 마치고 한숨 돌리며 그제야 가을의 숲을 방문했다. 일요일 오후에는 재즈를 들으며 오롯이 산책을 하리라 마음먹었던, 호수의 물이 유난히 따뜻하다고 했던 그해의 10월이었다. 누군가는 올해 겨울이 빨리  거라고,  누군가는  겨울은 지독할 거라고 예언했다. 스위스 사람들은 하루의 반을 날씨를 이야기하는데 소요하고 있다고 A 아주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아직 겨울을 말하기엔 이르지. 속으로 중얼거리며 A 숲으로 빠져들어갔다.  

 

제네바 중심에서 15분만 걸어나가면 크고 작은 공원과 숲을 마주한다


여전히 푸른 호수의 표면은 숲의 나무와 이파리들을 비추며 근사한 풍경을 담고 있었다. 흙을 밟으며 걷기 시작했다. 어제 저녁 가벼운 비가 내린 탓에 흙에서 먼지가 일지 않았다. 나무를  그루씩 지나칠 때마다 적당히 시원했고 적당히 햇볕이 등장했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시선을 사람들에게만 두고 살았던 그에게 자연은 차례를 오랫동안이나 기다려야 했다. 무심한 A 시선과는 무관하게 그동안 숲은 싹을 틔우고 최선을 다해 성장했음이 틀림없다. 나무를 무겁게 했던  가득한 이파리들이 이제는 땅에 내려올 준비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자연에 관심을 끊고 사느라 ‘체리가 익는 달’이 언제인지도 모른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에 관심을 두고 살고 있는 걸까요? ([나는 심리치료사입니다] 메리 파이퍼 저) 최근에 얻게  책에서  구절을 발견한 차였다. 


숲에서 노숙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노인은 등을 구부정하게 웅크리고는 벤치의 등받이에 종이를 올려놓고 펜을 눌러 글을 쓰고 있었다. ‘내가 메모할 노트를 가방에 챙겨 넣었던가? 가볍게 생각이 스쳤지만 이미 늦었다.


왼손으로 펜을 쥐고 무언가 적어내려가는 모습


그렇게 한참을 걷고  걸으며 속도를 내고 있던 순간 앞에 보이는 뒷모습, E였다. 하얀 에코백을 메고 아주 천천히 단정하게 걷는 그의 모습을 A  걸음 뒤에서 응시했다. 유난히 조용한 그의 발걸음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고요한 사람이다. A 잠시 망설였다. 곧이어  앞에 놓인 벤치에 차분하게 앉는 그를 확인하고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이윽고 메시지를 보냈다. E?”  

 

며칠  있을 한국 영화감독과의 불어 인터뷰 통역을 맡은 그가 잠깐 자료를 꺼내보겠다고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던 차였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그는 벤치에서 고개를 들어 보이고 A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에코백 안에는 텀블러 안에 챙겨  생수가 찰랑찰랑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동시에 물을  모금,  모금씩 마시고 곧이어 벤치에서 일어나 다시 천천히 함께 걷기 시작했다. 숲길을 나란히 걷다가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켜주기 위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E 텀블러에서 찰싹찰싹 생수가 소리를 냈다.

 


30분쯤 걷자 레만 호수를 관통하는 높은 교량이 나왔고 잠시 호수를 내려다보며 숨을 크게 쉬었다. 다시 숨이 차오를 만큼 높은 언덕을 오르자 마치 신비한 동화의  장면처럼 우거진 나무를 뚫고 작은 카페가 등장했다. 둘은 비슷한 호흡을 맞추어 걸어가 카페 깊숙한 자리에 마주 앉았다. A 머리카락 사이로 송골송골 올라온 땀을 닦고 어깨의 배낭을 내려놓으며 E 얼굴을 살폈다. ‘힘들지 않은가?  때마다 담담해 보이는 E 감정 표현이 크지 않았다. A와는  다른 성격이다.  

 

그렇게 마주 앉아 처음으로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일종의 성장담이었다. 문학을 사랑하시는 E 어머니가 그에게 읽어보라고 건넸던 <마담 보바리>, A에게 문학에 대한 취향을 갖도록   작가들, 둘은 책을 매개로 조금씩 속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나를 움직인 문장들, 친구가 되어보고 싶은 작가, 관심을 두고 있는 영화의 원작 소설, 스위스에서 여생을 마무리한 소설가, 불문학에 대한 이끌림, 서서히 많은 이야기들이 풀어져 나왔다. 조심하느라 드러내지 않던 평소 자신의 모습이  이야기를 통해 슬그머니 등장하기 시작했다. 

 


E 처음으로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했을  가장 먼저  일이 용돈을 쪼개 영화관 패스를 마련한 일이고, A 스위스에 왔을 때에는 점심시간에 회사를 빠져나와 제네바 시립 도서관의 도서대출증을 발급받은 일이라는  유추해보면 둘에게는 지적인 자극이  중요한 모양이었다. 텍스트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마치 오래전에 단련해온 근육이 탄력을 잃듯 무뎌지는  같아서 조바심을 내고 있는 마음까지도. 그리고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의 글을   있기를.


A E,   비슷한 페이지를 걷고 있던 듯하다. 일상에 매몰되어 지내다가 누군가 자신의 걸음 앞에 작은 열쇠를 떨어뜨려 놓은 것을 발견한 것만 같은  장면이 둘의 앞에 동시에 펼쳐졌을 , 지적인 해갈을 회복할  있기를 원하던 둘은 생각을 함께 했다. 열쇠를 줍기로. 그렇게 결정했다. 작은 단위의 북클럽을 만들어보기로, 단둘이서. 이름도 지었다. <느슨한 북클럽>이다. 같은 페이지를 따로 읽고, 함께 이야기하고, 번갈아가며 기록해보기로 했다. 느긋하게, 하지만 꾸준히 걸어보기로 했다.  글이 그것의 시작이다.  

 

얼마  E A에게 이메일  통을 전송한다.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제목은 <느슨한 북클럽  번째 제안서>. 함께 읽을  책의 제목이 곧이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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